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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건강다이제스트 &gt; 건강다이제스트(생생투병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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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간암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이상래 씨 체험담  “하나님의 은총과  아내의 정성이 저를 살렸어요”</title>
			<description><![CDATA[<P>어느 날 느닷없이 닥친 시련. 간암이었다. 수술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7~8cm 크기의 간암은 최악의 경우 2개월, 길어야 5~6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는 이상래 씨(67세). 그랬던 그가 악명 높은 간암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주인공이 됐다.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이웃을 위해, 이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산다. 그 비결은 과연 뭐였을까?&nbsp; </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 </FONT></P>
<P><FONT color=#0099ff></FONT>&nbsp;</P>
<P>&nbsp;</P>
<P><STRONG><FONT size=3><FONT color=#ff3300><IMG style="WIDTH: 262px; HEIGHT: 352px; 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4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201/08/132601802181.jpg" width=560 height=570>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FONT> <BR></FONT></STRONG>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보다.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국내 굴지의 대형은행에서 나이 마흔셋에 차장…. 이상래 씨는 누가 봐도 잘 나가는 인생이었다. 야망도 컸다. 은행의 꽃 지점장 자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하루하루 지점장의 꿈도 영글어가고 있었다. </P>
<P><BR>그런데 누가 시샘이라도 한 걸까? 1987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오른쪽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결리는 느낌, 창자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겠지 했다. 그런데 그 통증은 하루, 이틀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일주일이나 계속됐다. </P>
<P><BR>“안 되겠다 싶더군요. 멀쩡하던 몸에 갑자기 나타난 통증, 은근히 걱정도 됐어요.”<BR>그래서 찾아간 동네병원. 그런데 담당의사가 오른쪽 가슴께를 만져보더니 간이 부어 있다면서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한 번 받아보란다. </P>
<P>&nbsp;</P>
<P><BR>“그제서야 아차 싶더군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사실 그 당시 저는 B형 간염 보균자였어요. 예방주사를 맞으러&nbsp; 갔다가 우연히 간염 보균자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 후 잊고 살았어요.” </P>
<P><BR>몸에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잊고 살았다. 그런데 간이 부었다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부랴부랴&nbsp; 종합병원을 찾았고, 담당의사는 바로 입원을 하라고 조치했다.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거였다. </P>
<P><BR>그리고 이어진 각종 검사들. 모든 검사가 끝났을 때 의사는 말했다. “간에 작은 돌이 생겨서 수술해야 한다.”고. 이상래 씨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간에 박힌 작은 돌이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P>
<P><BR>그런데 수술 전날, 느닷없이 전해진 통보. “수술을 안 하기로 했다더군요. 부위가 너무 커서 수술 대신 동위원소시술을 하기로 했다나요.” 이상래 씨는 수술을 안 해도 된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동위원소시술이 수술보다 쉬운 치료법이라는 의사의 말에 오히려 잘됐다며 좋아했다. </P>
<P><BR>그렇게 해서 동위원소시술을 한 차례 받았다는 이상래 씨.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위원소시술을 받은 뒤부터 41도까지 열이 오르면서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입술은 부르트고, 해열제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5~6시간 단위로 열은 올랐다 내렸다 널뛰기를 했다. 한 달 하고도 5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열은 잡혔고, 퇴원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한 아름의 약을 쇼핑백에 담아 병원 문을 나선 이상래 씨. 한 달 5일 만에 그의 몸무게는 10kg이나 줄어 있었다.</P>
<P>&nbsp;</P>
<P><STRONG><FONT color=#ff3300 size=3>간에 박힌 돌이 간암이라고?&nbsp; <BR></FONT></STRONG>15일치 약 처방을 받아 퇴원한 이상래 씨. 병원에서 시킨 대로 열심히 약을 먹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P>
<P><BR>“그런데 퇴원을 한 지 3일째 되던 날, 아내가 조용히 자리를 잡으면서 말하더군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은 청천벽력이었어요.” </P>
<P><BR>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병이라고 생각하느냐?”고. <BR>그는 대답했다. “간에 돌이 박혀 있는 것 아냐?”</P>
<P><BR>그러자 아내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봉지를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이 약 먹어도 아무 소용없어요. 약국에 알아보니 소화제, 해열제, 영양제, 비타민제가 조금 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이 약으로는 당신 병을 고칠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병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 간암이라고 했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부터 이미 간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상태였다고 했다. <BR></P>
<P>‘내가 간암?’ 얼른 이해가 안 됐다. ‘암이라니…내가 왜?’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데 받쳐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끔찍한 상황.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P>
<P><BR>받아들일 수 없었다. 암은 죽음이었다. ‘오진이 아닐까?’ 실날 같은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아내가 암이라면 암이었다. 통곡을 하는 아내. 그러면서 하는 말, 병원에서 퇴원할 때 최악의 경우 2달을 넘기기 어렵겠다고 했단다. 길어야 5~6개월이라고 집에 가서 준비도 하고 정리도 하라고 했단다.</P>
<P><BR>‘내가 뭘 잘못했길래?’ 묻고 또 물어도 도무지 그 해답을 알 수 없었고, 이상래 씨 몸속에&nbsp; 똬리를 틀고 있는 7~8cm 크기의 간암은 결코 바뀔 수 없는 현실이었다. </P>
<P>&nbsp;</P>
<P><STRONG><FONT color=#ff3300 size=3><BR><BR>기적을 부른 사나이 <BR></FONT></STRONG><IMG style="WIDTH: 189px; HEIGHT: 253px; MARGIN-LEFT: 15px; CLEAR: both" alt=2 align=righ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201/08/132601802025.jpg" width=560 height=568><BR>‘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남한테 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시련을 주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P>
<P><BR>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죽는 것이 무섭다가도 기왕에 죽을 병이라면 내일이라도 당장&nbsp;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고, 희망도 줄 수도 없는 상황이 더 외롭고 고독하게 했다. </P>
<P><BR>지옥 같은 하루가 지났지만 이상래 씨가 처한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불면의 밤이 계속됐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죽음이 어른거리고, 놀라 깨고 또 깼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교회 목사님이 병문안을 하러 와서 예배를 드려주었다. </P>
<P><BR>“불행 중 다행이었을까요? 예배드리는 순간만은 제 처지를 잊을 수가 있었어요. 용기를 불어넣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는 희망도 생기고….” </P>
<P><BR>그래서 매일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시고, 38년 된 나병환자를 낫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도 일어나게 해주십사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P>
<P><BR>그 기도가 통했던 걸까? 기도를 시작하면서 잠을 푹 잘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깊은 잠을 자게 되면서 두려움의 시간도 점점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는 이상래 씨.</P>
<P><BR>그런 그에게 어느 날 교인 한 분이 내민 전단지 한 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단지에 쓰여 있는 글귀가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간질환은 식이요법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또 간경화, 간염을 이겨낸 사람의 체험담도 쓰여 있었는데 이거다 싶더군요.” </P>
<P><BR>그래서 물어물어 찾아간 곳 국제건강가족동호회. 간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상래 씨는 아직도 이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식이요법 지도를 받으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내리는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고 말한다. 성경 출애굽기 23장 25절에 나오는 구절 하나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라.”</P>
<P><BR>그래서 더 열심히, 온갖 정성을 다해 식이요법을 실천했다는 이상래 씨. 그 덕분이었을까? 그는 기적의 주인공이 됐다. 간암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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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FONT color=#ff3300><BR><BR><IMG style="WIDTH: 289px; 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201/08/132601801958.jpg" width=300 height=182>하나님의 은총과 아내의 정성으로 새생명 얻어</FONT> <BR></FONT></STRONG>이상래 씨는&nbsp; “하나님의 은총과 아내의 정성이 나를 살려냈다.”고 말한다. </P>
<P><BR>“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재래시장으로, 마트로 동동거리고 다니면서 재료를 구해서 생즙을 짜고, 밥하고, 호박중탕 만들고…. 그러니 어찌 안 먹을 수가 있겠어요. 그 정성이 고마워서 먹고 그 노력이 눈물겨워서 열심히 먹었어요.” </P>
<P><BR>또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면 먹는 물과 음식에 복을 내린다는 출애굽기의 구절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인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하면서 식이요법을 실천했다는 이상래 씨. 그 효과는 한 달 만에 나타났다.</P>
<P><BR>“피곤함이 사라지고, 혈색이 돌기 시작했고, 소변과 대변을 시원하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몸무게도 2kg이나 늘어났어요.”</P>
<P><BR>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2달, 3달이 지나면서 다시 은행에 출근도 할 수 있게 됐고, 7개월 쯤 됐을 때는 건강했던 시절의 컨디션으로 회복도 됐다. 다들 난리였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의사 친구는 몸 상태가 어떤지 제발 검사 한 번 받아보자고 성화였다. </P>
<P><BR>그는 알았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본들 도움이 될 것은 전혀 없었다. 수술할 생각도 없었고, 설사 암이 있다고 진단돼도 해코지만 하지 않으면 이렇게 같이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nbsp; <BR>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nbsp;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떠밀려 검사를 하러 간 병원. 초음파 검사를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에 찍은 차트와 대조도 해본다. </P>
<P><BR>‘더 나빠졌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의사가 말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암이 작아졌습니다. 7cm이던 암이 1cm로 작아졌습니다. 보다 정밀한 검사를 해보면 어떨까요?” </P>
<P><BR>그리고 얼마 뒤 다시 받은 CT 검사 결과는 그에게 온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선사했다.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P>
<P><BR>머리부터 발끝까지 4시간 동안 진행된 검사 결과는 그에게 최고의 순간을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에는 아무런 암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다른 장기에 전이된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것은 간암 진단을 받은 지 10개월 만의 기적이었다. </P>
<P><BR>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 이상래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BR>“지금도 하루 생즙 한 잔 마시기와 현미밥 먹기, 맥주효모 먹기 등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모든 병의 근원은 식사에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P>
<P><BR>신앙생활도 열심히 한다. 자신이 가진 것도 베풀며 산다. 특히 전국의 암환자의 모임인 밀알회 회장직도 맡아 암 진단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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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color=#ff3300 size=3>이상래 씨가 목숨 걸고 실천한 식이요법</FONT></STRONG> </P>
<P><STRONG>1. 물을 바꿔 먹다</STRONG></P>
<P>대부분의 사람들이 끓인 보리차를 마시던 시절. 오늘날의 생수는 시판되고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생수를 마시라고 했다.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미군 부대에만 납품되던 생수를 어렵게 구해 먹었다. </P>
<P><BR><STRONG>2. 현미잡곡밥을 80~90번 씹어먹다</STRONG></P>
<P>현미를 파는 곳도 없는 상황. 정미소에 직접 부탁해 현미를 구하고, 여기에 강낭콩, 율무, 팥, 조, 수수 등 서너 가지를 바꿔가며 섞어서 밥을 해먹기 시작했다. 특히 밥 한 숟가락을 입안에 넣고는 80~90번을 씹어서 물이 되게 해서 넘겼다.</P>
<P><BR><STRONG>3. 생즙 3잔 꼭꼭 마시기</STRONG></P>
<P>식전 30분 전에 케일+신선초+돌미나리+돗나물+쑥+민들레+씀바귀 등을 넣고 생즙으로 만들어 하루 3잔 꼭꼭 씹어서 마셨다.</P>
<P><BR><STRONG>4. 반찬은 발효식품과 뿌리채소 위주로 먹다</STRONG></P>
<P>전통 된장, 잘 익은 김치, 김·미역 등의 해조류, 연근·당근·더덕·도라지·우엉 등의 뿌리채소, 각종 나물류, 버섯류 위주로 식단을 차려서 골고루 먹되, 소화가 잘 되는 식품을 주로 먹었다. 그런 반면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반찬이나 색소, 방부제, 외식은 절대 삼갔다. </P>
<P><BR><STRONG>5. 콩즙도 하루 2잔</STRONG></P>
<P>메주콩을 푹 삶은 뒤 갈아서 만든 즙을 식간에 한 잔씩, 하루 2잔 마셨다. 단백질이 많아 간세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마셨다.</P>
<P><BR><STRONG>6. 영양보조로 호박중탕도 늘 복용</STRONG></P>
<P>늙은 호박의 뚜껑을 따고 씨를 빼낸 뒤 여기에 미꾸라지 1kg을 씻어서 넣고 마늘도 2주먹쯤 넣어서 찜통에서 10시간 정도 중탕하면 형체는 그대로 있으면서 익는데 이것을 으깬 뒤 그 즙을 짜서 하루 2컵 마셨다. 호박은 몸속 노폐물을 빼주고 피를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어서 열심히 먹었다. </P>
<P><BR><STRONG>7. 굼벵이, 와송, 재첩국 등도 틈틈이 먹다</STRONG></P>
<P>7년 동안 굼벵이로 살다가 7일간 매미로 살다 가는 굼벵이, 또 기와에 자생하는 신비의 식물 와송, 예로부터 간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재첩도 아내의 갖은 정성에 의해 약처럼 만들어졌고, 이를 틈틈이 먹고 마셨다.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1258</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2-01-08 19:24:15</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직장암 2기 이겨 낸 정회숙 씨 체험담 “마음을 비우면 지상은 천국이에요”</title>
			<description><![CDATA[<P>미움도 잊고, 애착도 버리고 오로지 매달린 건 기도와 감사뿐! 그랬던 덕분이었을까? 직장암 2기 판정을 받았던 정회숙 씨(62세)는 암으로부터 기사회생한 주인공이 됐다. 그 비결은 뭐였을까?&nbsp;&nbsp; </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 </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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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FONT></STRONG>&nbsp;</P>
<P><STRONG><FONT size=3><IMG style="WIDTH: 231px; HEIGHT: 316px; 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5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112/04/132297825805.jpg" width=300 height=352>남편의 외도, 그리고 암 <BR></FONT></STRONG>오십을 갓 넘긴 어느 날 정회숙 씨는 경악했다.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다. 그것도 10년 동안 남편의 외도 사실을 감쪽같이 몰랐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P>
<P>&nbsp;</P>
<P>건축업을 했던 남편.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와도 일 때문이려니 했지 외도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분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갈라서? 당장 그럴 수도 없었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4남매가 걸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정회숙 씨의 절망은 깊어만 갔다. </P>
<P>그 때문이었을까? 남편에 대한 미움으로 하루하루가 힘들던 어느 날, 배가 살살 아프면서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P>
<P><BR>“처음에는 별일 아니겠지 했어요. 그런데 그 증상이 하루 이틀 지나도 낫지 않아 동네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그러더군요.” </P>
<P><BR>&nbsp;</P>
<P>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큰 병원에 간 정회숙 씨.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P>
<P><BR>“암이었어요. 직장암 2기라고 그러더군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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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직장암 진단, 요양병원을 가다 </FONT></STRONG><BR>2002년 6월 18일! 정회숙 씨는 그 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암 진단을 받은 날이다. <BR>“내게 왜 이토록 가혹한 형벌을 주나 분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정녕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P>
<P><BR>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이룰 수조차 없었던 그녀. 결국 일주일 뒤 수술대 위에 올랐다. 그리고 직장 10cm 위에 있는 암을 제거했다. 하지만 직장 21cm를 잘라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P>
<P><BR>“인간으로서 너무나 수치스런 상태가 돼 있었습니다. 소변과 대변을 조절하는 기능이 망가져버렸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소변과 대변을 참을 수도 없었고, 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킬 수 없는 상태였어요.” </P>
<P><BR>입원 한 달 후 퇴원을 했지만 그 상황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더 큰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은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다. 여전히 일 핑계로 지방에 머물기 일쑤였다. <BR></P>
<P>“몸이 아프면 마음까지 약해진다고 그러잖아요. 그런 남편이 더 야속하고 제 처지가 더 서러워서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P>
<P><BR>그런 그녀가 마지막 희망처럼 찾아든 곳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요양병원이었다. 암 수술로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고, 남편에 대한 미움으로 마음엔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품은 채였다.<BR></P>
<P>“그런 제 상태를 짐작이라도 한 듯 도착하자마자 요양병원 원장님은 휴대폰도 꺼버리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고 그러시더군요. 그리고 그날부터 자연요법을 시작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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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자연요법, 새로운 희망을 찾다 <BR></FONT></STRONG>요양병원에 들어가면서 남편에 대한 미움도,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도 모두 잊고 하루하루 생활에만 충실하려고 애썼다는 정회숙 씨. 추석 명절 때 집에도 안 가고, 한 달에 한 번씩 오라던 병원에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오로지 요양병원 생활에만 전념했다.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살라는 말씀에 충실하였고, 운동을 해야 하는 시간은 꼭꼭 지켰으며, 웃음 치료 시간에는 누구보다 크게 웃었다. 자연식으로 차려준 음식도 맛있게 먹었다. </P>
<P><BR>비록 수술 후유증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고, 설사하고 배 아프고, 항문까지 헐어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지만 비관 대신 감사를, 미움 대신 용서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BR></P>
<P>달릴 수도 없고, 쪼그려 앉을 수도 없으며, 몸을 압박하는 브래지어도 못하고 구두도 못 신는 몸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찬양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명상을 했다. 유전자의 NK세포가 암세포를 잡아먹는 상상을 하면서 명상을 했다고 한다. <BR></P>
<P>그랬던 덕분이었을까? 8개월 뒤 요양병원 문을 나섰을 때 그녀의 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설사하고 배 아프고, 방귀만 나오려고 해도 아픈 항문의 통증이 언제부턴가 참을 만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밑그림도 그려졌다. </P>
<P><BR>“그래서 요양병원을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이사를 했어요. 요양병원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마련했고, 지금껏 해오던 그대로를 실천하면서 3년을 살았습니다.” </P>
<P><BR>그 결과는 놀라웠다. 정회숙 씨는 그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녀가 그렇게도 원했던 ‘된똥’을 볼 수 있게 됐던 것이다. <BR></P>
<P>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자연식을 하고 운동을 하고 감사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보답은 그녀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또 2년이 흘렀을 때 대소변까지 가릴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구두도 신을 수 있게 됐고, 브래지어도 할 수 있게 됐다. 정회숙 씨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2007년의 일이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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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남편은 내 인생의 공로자!<BR></FONT></STRONG>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1년 10월 현재. 직장암 수술을 한 지 9년이 흐른 지금 정회숙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P>
<P><BR>여전히 5시30분 일어나서 아침 기도를 하고 1시간 정도 운동을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꼭꼭 한다. 걷기운동, 에어로빅을 최대한 즐겁게 한다. 식사도 철저한 현미식과 야채식을 한다. 현미밥에 각종 채소와 나물반찬을 먹고, 수시로 들깨죽을 쑤어 먹는다고 한다. </P>
<P><BR>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P>
<P>&nbsp;“남편 분은 어떠세요?” </P>
<P><BR>“남편은 제 인생의 공로자예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게 해주었으니까요. 사실 남편도 내 남편이 아니고 돈도 내 돈이 아니라는 걸 예전에는 잘 몰랐어요. 그 사실을 깨닫고 모든 걸 내려놓으니까 지상이 바로 천국이더군요. 그래서 오늘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nbsp; 사람입니다.” </P>
<P><BR>그래서 하루하루를 축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정회숙 씨. 그런 때문일까? 지금 그녀의 몸에서 암세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P>
<P><BR>화장실은 어떨까? “물론 자주 가는 편이지만 통증은 전혀 없어요.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BR>&nbsp;그 말이 긴 여운을 남기며 오래오래 귓전에 맴도는 것은 왜일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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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BR><STRONG><FONT color=#8f0197><BR><IMG style="WIDTH: 161px; HEIGHT: 256px; 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3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112/04/132297752992.jpg" width=210 height=285>정회숙 씨의 건강 회복에 도움을 줬던 요양병원에서의 하루 일과표 </FONT></STRONG></P>
<P>&nbsp;</P>
<P>●&nbsp; 5시 30분 : &nbsp;새벽기도 후 스트레칭 하기&nbsp; <BR>●&nbsp; 6시경 :&nbsp; 포도즙 한 잔 마시기 <BR>●&nbsp; 7시~8시 : &nbsp;아침식사 하기. 식사는 완전 현미식과 야채식으로 </P>
<P>&nbsp;&nbsp;&nbsp;&nbsp; 1시간 정도했다.&nbsp;제철채소 2~3가지와 견과류, 제철 과일로 꾸민 식사를 </P>
<P>&nbsp;&nbsp;&nbsp;&nbsp;&nbsp; 했다.<BR>●&nbsp; 8시 ~9시 : &nbsp;웃음치료 하기. 무조건 웃었고, 모든 걸 잊고 웃었다. <BR>●&nbsp; 10시 : &nbsp;뒷산 산책하기 <BR>●&nbsp; 11시 30분 : &nbsp;여러 가지 채소로 짠 녹즙 한 잔 마시기 <BR>●&nbsp; 12시~1시 : &nbsp;현미식과 야채식으로 점심식사 하기 <BR>●&nbsp; 1시 이후 : &nbsp;자유시간에는 주로 뒷산 산책하기 <BR>●&nbsp; 4시 : &nbsp;건강강의 듣기 <BR>●&nbsp; 5시 : &nbsp;당근즙 한 잔 마시기 </P>
<P>●&nbsp; 5시 30분 : &nbsp;간단한 저녁식사 하기.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통밀빵을 먹음. <BR>●&nbsp; 7시~8시 : &nbsp;건강강의 들은 후 족욕하기 <BR>●&nbsp; 8시 30분 : &nbsp;잠자리 들기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1225</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1-12-04 14:46:37</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유방암에서 임파선 전이까지… 김정란 씨 희망가  “아직은 미완성, 그래도 하루하루는 축복이에요”</title>
			<description><![CDATA[<P><FONT color=#0099ff>여린 듯 온화한 표정 뒤에 숨어 있는 굳은 의지, 극단의 시간을 넘어 새 생명을 향해 달려가는 쉰하나 김정란. 그녀는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삶을 노래하고 있다.&nbsp;&nbsp; </FONT></P>
<P><FONT color=#0099ff>글 | 건강칼럼니스트 문종환 </FONT></P>
<P><FONT color=#0099ff></FONT>&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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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FONT color=#0084a0><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1 align=left src="http://www.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111/06/132058250757.jpg" width=300>참고 있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의 결과가 이것인가?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저마다 이 세상에서 뚜렷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 했지만 이 순간에 난 없다. 너무도 초라한 삶의 여정, 그리고 그 성적표. 이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FONT></P>
<P><FONT color=#0084a0><BR>암을 몸에 담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잠깐 사이의 시간은 마흔일곱의 세월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밤낮으로 울면서 참담한 심경을 쏟아냈고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세상엔 나 혼자다. 누구도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다. 그것은 순전히 내 몫이다. 내가 다시 서야 한다.&nbsp;&nbsp; <BR>- 김정란의 투병일기 중에서</FONT></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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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이혼해 줘!<BR></FONT></STRONG>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3일 밤낮을 눈물로 보내고 난 후 3일 동안 생각에 빠졌다. 과연 원인이 무엇일까? 그녀는 피부 숍을 운영하면서 건강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도 가지고 있었다. 야채를 즐기지는 않았어도 그것이 원인이 될 만큼은 아니다. </P>
<P>&nbsp;</P>
<P>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마음의 짐이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남편과의 일상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하지만 그녀의 경우 그 굴레가 삶의 무게를 가중시켜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P>
<P><BR>그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환경이 그녀에게 준 최고의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니 부부라는 이름의 족쇄를 하루라도 빨리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방암 진단을 받은 지 3개월 후에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해 줘!”라고 했고 남편도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녀는 그 대답을 듣고 ‘이제 살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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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화학요법을 거부하다<BR></FONT></STRONG>그녀는 유순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강했다. 보통 암 진단을 받으면 병원치료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하루빨리 병원치료를 받지 않으면 마치 내일이라도 죽을 것처럼 그렇게 호들갑을 떤다. 그런 의사들의 권유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P>
<P>&nbsp;</P>
<P>그런 그녀였기에 진단받고 바로 시작한 것이 대체요법이었다. 수술을 보류한 채 45일간 그녀는 대체요법을 적용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경제적 부담도 너무 커 병원치료와 병행하기로 했다. 2/3를 잘라내고 면역보조제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에 관한 책과 인터넷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과정에서 소책자 한 권을 만났다. 마음의 힘이 된 그 책에 대해서 그녀는 오랫동안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환자를 만나면 그 책자를 구해서 나눠주고 있다. </P>
<P><BR>수술을 한 후 보통의 치료과정은 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다. 목표는 남아 있는 암세포를 죽이고 새로운 암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누구나 가는 길이다. 그녀 역시 의료진으로부터 항암화학요법 6회, 방사선치료 32회를 처방받았다.&nbsp; 그러나 그녀는 그 길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몇 권의 책이 그녀가 그 길을 선택하는 데 제동을 걸었다. </P>
<P><BR>2007년 9월부터 2008년 5월까지, 8개월 동안 암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마음 챙김이었다. 편안한 마음과 긍정적 사고가 치유의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믿었다. </P>
<P><BR>낮 동안에는 몸을 부단히 움직였다. 거의 매일 산행과 산책은 그녀의 일과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했다. 모든 환자가 그렇겠지만 산에 가는 것은 그녀에게 여러 가지 즐거움을 주었다. 소나무·편백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찰랑거리는 계곡의 물소리, 지지배배 새소리…. 햇살 가득한 날이면 자연의 교향곡이 힘차게 울려 퍼지고 숲은 생명의 기적이 시시때때로 일어났다. </P>
<P><BR>시리도록 추운 날은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5~6번 반복하며 산책을 감행할 것인가를 망설였다. 그러다가 살기 위해 차디찬 바람을 가슴으로 맞이하며 산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별빛을 쳐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을 에는 찬바람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암으로 인하여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서글퍼졌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 ‘부모님보다 먼저 가면 안 된다.’는 것이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P>
<P><BR>그녀의 8개월간의 밥상은 어땠을까? 일어나서 따뜻한 물 한 컵을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씹어서 먹었다. 그런 후 사과 1/2개, 파프리카 1/2개, 브로콜리 1/2개, 고구마 100g 2개로 아침을 대신했다. 점심과 저녁은 현미잡곡밥에 채소반찬이다. 점심은 도시락으로 산에서 먹는 경우가 많았고 저녁은 양을 적게 하여 간단히 먹었다.</P>
<P>&nbsp;</P>
<P>후코이단, 홍삼즙액, 식물성아미노산 등을 보조제로 활용했다. 그녀의 8개월을 정리하면 소박한 밥상과 강한 정신력이다. 그리고 2008년 5월, 그녀는 퇴원 후 첫 검사를 받았다. 상당히 호전됐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는 그녀의 승리를 예고하는 듯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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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먹고사는 문제, 그리고&nbsp; 뼈 전이<BR></FONT></STRONG>2009년 1월 검사 때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홈 파티 위주의 새 사업은 그녀로 하여금 잠시 동안 암 환자라는 사실을 잊게 했다.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새 일은 1년 동안 그녀가 가지고 있던 체력을 모두 소진시키고 2010년 3월, 골반 뼈 전이를 추정하는 진단을 받게 했다.</P>
<P><BR>2010년 7월, 뼈 스캔과 PET 검사 결과 골반 뼈 전이는 확실해졌고 담당의사는 항암화학요법을 제안하였다. 몇 가지를 물어본 후 그녀는 항암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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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다시 옷깃을 여미며<BR></FONT></STRONG><IMG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alt=2 align=right src="http://www.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111/06/132058250857.jpg" width=300>한 순간 방심이 가지고 온 결과는 엄청났다. 다시 수렁으로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전이된 상황에서도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다. 암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식습관 등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고, 그런 때문에 그것들을 바꿔주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P>
<P>&nbsp;</P>
<P>즉 그녀는 깨달음의 도구로서의 암癌,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줄 기회, 즉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두렵지 않다. 전이에 대한 불안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면 거짓이다. 감정조절이 안 되고 예민해지며 우울증, 불면증도 겪었다. </P>
<P><BR>한 줄기 빛이 간절했지만 불길하고 굶주린 살쾡이의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절망 속에서 신음했다. <BR>암 진단을 받고 3일 동안 그녀가 경험했던 극한감정의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라는 생명을 싹틔웠으나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시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P>
<P><BR>다시 그녀는 시들어가는 싹에 사랑과 정성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 작정이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 죽을까보다 어떻게 죽을까가 더 고민이 된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P>
<P>“덜 미워하고 더 사랑하며 덜 가지고 더 행복하겠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을 열심히 살며, 잘못된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새로운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갖지 못함을 불평하지 않고 베풀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있음을 기쁘게 즐기겠습니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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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size=3>아직은 미완성 <BR></FONT></STRONG><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3 align=left src="http://www.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111/06/132058250938.jpg" width=300>그녀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비록 과로 누적으로 전이가 된 상황이긴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충분히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마인드컨트롤, 마음 챙김, 몸 돌봄 등 치유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그녀는 동료환자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다. 절망에 빠진 암 환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P>
<P>&nbsp;</P>
<P>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한 그녀를 보고 절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식물에 물을 주고 거름을 줘 정성스럽게 길러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이제 그녀는 정성과 사랑이라는 거름을 줘 자신의 몸 살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소홀했던 점을 반성하며 몸에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P>
<P><BR>몸과의 대화로 그녀는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그 중 가장 큰 소득이 통증이다. 아직 큰 통증은 오지 않았지만 그런 통증이 오려는 기미만 보여도 그녀는 자신의 몸과 대화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증상이 사라짐을 경험하고 몸과 대화하는 것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의 투병은 현재 진행행이다. 아직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암으로 투병하는 환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P>
<P><BR>그녀의 사례가 항암화학요법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유방암-임파선 전이-골반 뼈 전이를 치유한 모범 케이스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P>
<P><BR><FONT color=#8f0197>● 2007년 8월&nbsp;유방암, 임파선 전이 진단<BR>● 2007년 9월&nbsp;수술(2/3절제)<BR>● 2007년 9월&nbsp;수술 후 항암화학요법 6회, 방사선치료 32회 처방<BR>● 2007년 9월&nbsp;항암과 방사선치료 대신 자연ㆍ대체요법 실천<BR>● 2008년 5월&nbsp;상당히 호전돼 항암과 방사선치료 필요 없다는 의사의 진단<BR>&nbsp;(2007년 9월부터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하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치료시기를 연기해 왔음) <BR>● 2009년 4월&nbsp;새로운 사업시작<BR>● 2010년 3월&nbsp;골반 뼈 전이 추정 <BR>● 2010년 7월&nbsp;3월 진단과 동일한 결과 나옴. 타목시펜 처방<BR>● 2010년 7월&nbsp;타목시펜 복용 후 심한 부작용으로 복용 중단<BR>● 2011년 7월&nbsp;생즙단식<BR>● 2011년 9월 &nbsp;아직은 투병 중. “새 생명은 계속된다,”는 신념으로 의욕에 찬 생활을 하고 있음.</FONT></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1210</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1-11-06 21:23:35</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폐암 말기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황자임 씨 체험 보고서</title>
			<description><![CDATA[<img alt="1"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width: 280px; height: 415px;" src="../../_sys/_upload/image/201110/04/131770176949.jpg" align="left"><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span style="color: rgb(0, 153, 255);">“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놀라운 기적을 일궈냈어요” </span></font><br style="color: rgb(0, 153, 255);"><br style="color: rgb(0, 153, 255);"><span style="color: rgb(0, 153, 255);">비바람은 꽃을 지게 하기 위해 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하기 위해 부는 것이며 우리에게 닥친 시련은 우리를 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행복과 참가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오는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말하는 황자임 씨(48세). 풀 한 포기 나뭇잎 한 장에도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고 잿빛 세상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꽃피기 시작했다며 좋아하는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nbsp;&nbsp; </span><br style="color: rgb(0, 153, 255);"><span style="color: rgb(0, 153, 255);">글 | 건강칼럼니스트 문종환 </span><br><br><span style="color: rgb(0, 153, 153);">&lt;진료일지&gt;</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 2008년 2월 &nbsp;</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nbsp; &nbsp;- 폐암 말기 진단/수술 불가</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nbsp; &nbsp;- 항암화학요법 제의/의미 없는 항암요법 하지 않겠다고 결심</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nbsp; &nbsp;- 항암화학요법을 받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체력 바닥</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nbsp; &nbsp;- 담당의는 이대로 퇴원하면 죽는다고 결론</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 2008년 11월 </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nbsp;&nbsp; - 암은 사라졌다고 진단</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 2011년 9월 현재 </span><br style="color: rgb(0, 153, 153);"><span style="color: rgb(0, 153, 153);">&nbsp;&nbsp; &nbsp;-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즐겁게 생활하고 있음</span><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무너진 몸</font><br>일곱 시, 아침밥을 차리기 위해서 그녀는 눈을 떴다. 눈을 떠 일어나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br>“어~, 왜 이러지?” 그녀는 다시 한 번 안간힘을 줘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세 번째 시도, 책상을 붙잡고 모든 기력을 동원해 가까스로 일어섰다. 그러나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방바닥에 쓰러졌다. 몸의 모든 기능은 마비된 듯했다. <br><br>결국 남편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어릴 때부터 병원 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그녀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CT, PET, MRI, 내시경 등 각종 검사가 시작되었고 그녀는 지루하고 긴 시간을 참아야 했다. <br>결과는 청천벽력! 폐암 말기란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생각의 파편들이 일순간 한 곳에 모이더니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무엇을, 또 누구를 위한 시간들이었나?’<br><br>그녀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새하얀 병실의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몸은 폐암 말기 환자가 되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선택은 없었다!</font><br>“수술은 어렵습니다. 항암치료도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br>담당의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은 병원치료를 강행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퇴원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담당의사는 “이대로 퇴원하면 3개월을 넘기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항암치료라도 해볼 것을 권유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 기력, 그리고 정신적인 충격은 병원치료를 강행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고 결국 남편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br><br>그렇게 해서 일주일 만에 말기암 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병원을 나서야 했다. 설움이 북받쳤다. 정녕 죽어야 한단 말인가? 아직도 정신은 온전한데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 남편은 이대로는 집에 갈 수 없다는 판단에서 전국의 요양원과 쉼터를 수소문해서 마음에 드는 한 곳을 찾아서 그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쉼터 원장은 그녀의 회복을 도와주기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애썼으나 먹지도 움직일 수도 없는 그녀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br><br>결국 쉼터 원장의 소개로 의료시설이 갖춰진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녀를 회복시킬 비방은 없었다. 쉼터에서 5일, 요양병원에서 영양제를 맞으면서 버틴 이틀 만에 무너진 몸을 부둥켜안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nbsp;&nbsp; &nbsp;<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통증, 그 악몽의 시간들…</font><br>집에 돌아오니 그녀를 반긴 것은 참을 수 없었던 통증이었다. 죽음도 이보다는 더 비참하고 고통스럽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죽음을 달라고 소리쳤다. 신의 저주인가! 남편도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까지 희망을 걸어볼 것인가는 순전히 남편의 생각에 달린 것이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남편은 그동안 배운 각종 자연요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br><br>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단식이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먹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했다. 살기 위해서는 물이라도 먹어야 했으니 그녀는 마지막으로 입술을 적신다 생각하고 물을 입에다 갖다 댔다. 그리고 조금씩 입으로 목 넘김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넘기려 해도 다시 토해내고를 반복했지만 어느 순간 조금씩 물마심이 가능해졌다. <br><br>생명의 경이로운 힘이 작동했던 탓일까? 그런 후 채소생즙을 조금씩 마실 수 있었고 다음은 강된장에 생식을 버무려 먹을 수 있게까지 됐다. 그리고 다음은 고구마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br></font><table style="clear:both;margin-left:15px;" width="300" align="right" cellpadding="0" cellspacing="0"><tbody><tr><td><img alt="3." src="../../_sys/_upload/image/201110/04/131770177107.jpg" width="300"></td></tr><tr><td style="padding-top:4px;font-size:11px;font-family:dotum;color:#808080;line-height:120%;">황자임 씨는 단식, 채소냉즙, 관장 등을 통해 폐암의 고통에서 벗어났다.</td></tr></tbody></table><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달라진 세상</font><br>그녀가 기운을 차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어느 낯선 곳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또한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는데 자신의 모습만 봐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돈에 집착하고 가족들에게 거친 말도 서슴지 않았던 그녀의 모진 성격은 빛이 바랜 색처럼 옅어져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죽음으로 가는 긴 터널,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희망이라는 아주 작은 빛을 찾는 것뿐이었다. <br><br>다행히도 그녀는 남편의 사랑으로 희망이라는 밧줄을 타고 올라올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많은 것을 바꾸게 했다. <br>환란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는 것일까? 하늘은 위기를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참가치를 깨닫게 하고 또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일까?<br>황자임 씨는 암을 깨달음의 도구로 하여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그녀가 했던 투병의 도구들</font><br>황자임 부부의 첫인상은 따뜻함이었다.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그리고 일체의 병원치료도, 값비싼 건강식품도 먹지 않고 오로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치유의 기적을 일궈냈다는 점에서 여느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br><br>그녀가 투병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은 단식, 채소생즙, 생곡가루, 생채슬라이스범벅, 관장, 모관운동, 기체조, 명상, 야채수프, 음악과 막춤, 생각 바꿈으로 마음 챙김, 남편의 헌신적 사랑이 전부다. <br>지금도 그녀는 마음수련을 강조한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그동안 그녀가 지옥 같은 마음으로 처절하게 생활해 왔다면 이제는 그 모든 욕심을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원한다. 결국 돈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바꿔 치유에 이르도록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 암 치유의 핵심 열쇠임을 그녀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진짜 투병은 지금부터</font><br>진단 9개월 만에 ‘암이 없어졌다.’라는 기적적인 판정을 받았지만 그녀는 그것이 곧 완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CT나 MRI상에 보이는 것만 암은 아니라는 것. 이들 장비에 잡히지 않은 미세 암세포들이 다시 암 덩어리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투병의 목표가 되고 있다. <br><br>&nbsp;그래서 지금부터가 진짜 투병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황자임 씨.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비싼 약이나 병원치료가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일, 즉 몸과 마음을 안녕상태에 있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몸을 안녕상태에 있게 하는 것은 밥상이고, 마음을 안녕상태에 있게 하는 것은 명상이나 웃음, 그리고 마음 챙김 수련임을 그녀는 알고 있다. &nbsp;<br><br><br><img alt="2" style="clear: both; margin-left: 15px; width: 229px; height: 308px;" src="../../_sys/_upload/image/201110/04/131770177035.jpg" align="right"><font style="font-weight: bold; background-color: rgb(204, 0, 255); color: rgb(255, 255, 255);" size="3">황자임 씨의 하루 일과</font><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6시 30분 기상 : 채소생즙 1컵(당근, 케일, 신선초, 돌나물, 미나리, 민들레 등 채소와 풀들을 섞어 만든 생즙)</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아침 : 생곡가루 및 생채 슬라이스 섭취(생곡가루 두 큰스푼+생채 슬라이스 범벅 한 공기. 생곡가루는 현미 50%, 율무, 콩, 기장, 조, 수수, 팥 등을 섞은 것 50%를 가루로 만든 것. 생채 슬라이스 범벅은 온갖 채소를 잘게 조각낸 후 매실발효액에 버무린 것) &nbsp;</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10시 : 산행(맨발로 걷기, 스트레칭, 기체조, 명상 등으로 2시간 정도 소요함)</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점심 : 현미자연식(현미잡곡+채소 중심의 반찬)</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오후 : 야채수프를 직접 만들어 음용하고 생즙거리도 준비한다. </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저녁 : 아침식사와 동일하게 실행</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저녁식사 후 : 남편과 아이들이 들어오는 시간 전, 잠깐 동안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막춤을 춤.</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모관운동, 합장합척운동, 붕어운동, 등배운동 등은 거의 매일 함.</span><br style="color: rgb(143, 1, 151);"><span style="color: rgb(143, 1, 151);">●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커피관장을 함.</span><br><br>※ 그녀는 한 끼의 식사를 하는 데 최소 1시간을 사용한다. 무엇을 먹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는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는 음식물을 충분히 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오랫동안 씹어 충분히 침과 섞어 즙액으로 만든 후 목 넘김을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소화기계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영양소의 소화 흡수에도 많은 도움을 줘 인체 각 기관의 기능 향상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b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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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category><![CDATA[admin]]></category>
									<dc:date>2011-10-04 13:13:2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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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장암 3기 진단 받은 황규명 씨 체험담</title>
			<description><![CDATA[<span style="color: rgb(0, 153, 255);"><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암은 수술로 끝이 아닙니다. 이때부터 항암생활 꼭 실천하세요”</font><br><br>암을 이겨낸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숙연해진다. 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흘렸을 진한 땀과 숱한 눈물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암=사망 선고로 여겨지는 시대, 그래서 암 진단은 우리 생명의 최대 위협자다. 시시각각 조여드는 생명의 분침소리도 들어야 한다. 신장암 3기 판정을 받았던 황규명 씨(58세)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암 환자가 되었던 사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암세포에게 한 쪽 신장을 잃었지만 오늘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검사 결과를 받는다. 이 같은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뭐였을까?&nbsp;&nbsp; </span><br style="color: rgb(0, 153, 255);"><span style="color: rgb(0, 153, 255);">글 | 이은혜 기자</span><br style="color: rgb(0, 153, 255);"><br><img alt="1" style="clear:both;margin-right:15px;" src="../../_sys/_upload/image/201109/02/131495418196.jpg" width="300" align="left"><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2007년 봄은 잔인했다!</font><br>2007년 봄, 어느 날이었다. 등쪽이 아팠다. 결리는 듯 아팠다. ‘괜찮아지겠지.’ 했던 증상이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날로 그 증상이 심해졌다. 안 되겠다 싶어 한방병원에 갔다. 침이라도 맞아볼 요량이었다. <br>그런데 진찰을 마친 한의사의 반응이 좀 뜻밖이었다. X-레이를 찍어보자고 했다. <br>그 말을 들은 황규명 씨는 “집에 가서 찍어보겠다.”며 인천 집으로 올라왔다. <br><br>“그 당시 직장 때문에 목포에서 혼자 타향살이를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진찰을 마친 한의사의 반응이 조금 걸려 곧바로 인천으로 올라왔죠.” <br>그리고 평소 다니던 병원에 갔다. 초기 당뇨와 고지혈증, 담석증 등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다니는 병원이었다. <br>“80kg에 육박하는 체중 때문인지 몰라도 몇 가지 만성병을 갖고 있었어요. 게다가 직장 때문에 혼자서 타향살이를 하다 보니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해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었죠.” <br><br>우선 내분비내과로 갔다. 등쪽이 아프고, 결리면서 어지러운 증상이 있다고 호소하자 담당 의사는 위 내시경을 한 번 찍어보자고 했다. 종양이 있으면 어지러울 수 있다고도 했다. <br>검사 결과는 바로 나왔다. 별다른 이상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br>그래도 못내 미심쩍어 1년마다 받는 초음파 검사도 한 번 받아보기로 했다.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왔다. <br>다시금 병원에 결과를 들으러 간 날. 그런데 진단 결과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담당의사가 느닷없이 비뇨기과로 가란다. “왜 비뇨기과로 가야 되는지 물어도 그냥 가라고만 하더군요.” <br><br>하는 수 없이 초음파 검사 기록을 들고 비뇨기과로 간 황규명 씨. “그런데 초음파 기록을 본 비뇨기과 담당의사가 상상조차 못한 말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느닷없이 신장암이라고 그러더군요.” 몽롱했다. 암이라니…. 그 무서운 암?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br>그런 와중에 그의 입에서 느닷없이 흘러나온 말, “생존율은요?” 이었다고 한다. <br>“그러자 담당의사 선생님이 75% 살 희망이 있는 신장암 3기라고 하더군요.” 생존율 75%? 그 말은 죽을 확률도 25%나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수술,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font><br>아무런 준비도 없이 신장암 3기 진단을 받은&nbsp; 황규명 씨. <br>그 후의 일은 마치 꿈속 같다고 말한다. 수술 일정이 잡히고 주변 정리도 했다. 비록 생존율이 75%나 된다고 했지만 암은 암이었고, 어떤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 우려 속에서도 불행 중 다행처럼 수술은 잘 됐다. 오른쪽 신장을 떼어내면서 암세포도 함께 제거됐다. <br><br>하지만 수술 후유증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잘 먹지도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면서 체중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퇴원 10일 만에 10kg이나 빠지더니 그 흐름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해보였다. 이래선 말라 죽겠다 싶었다. <br>“그래서 잘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부축을 받아가며 운동을 시작했어요. 인천대공원을 매일매일 걸었으니까요.” <br><br>그래도 좀체 회복되지 않는 몸.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그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비로소 살 길을 찾은 것이었다고 믿고 있다. <br>“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들른 서점에서 암은 수술을 했다고 결코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진짜 항암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 거죠. 그것은 암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얻어낸 결론이었습니다.” <br>이때부터 그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식사도, 생활도, 마음가짐도 오로지 암을 이기기 위한 항암요법에 모아졌다. <br>그러자 조금씩 기력을 찾기 시작한 몸. 그러나 또 한 번의 시련 앞에서 그는 지금 한여름에도 양발을 신고 산다. <br><br><table style="clear:both;margin-left:15px;" width="300" align="right" cellpadding="0" cellspacing="0"><tbody><tr><td><img alt="2." src="../../_sys/_upload/image/201109/02/131495418286.jpg" width="300"></td></tr><tr><td style="padding-top:4px;font-size:11px;font-family:dotum;color:#808080;line-height:120%;">황규명 씨는 손수 밥을 짓고 생즙을 짜고 한방차를 달여 먹는다.</td></tr></tbody></table><font size="3"><span style="font-weight: bold;">오진, 그래도 지금은 행운아!</span></font><br>“수술을 하고 3개월 정도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그날은 PET를 찍어보자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PET 촬영 결과 얼굴뼈로 암이 전이된 것 같다며 항암제를 써보자고 했습니다.” <br>눈앞이 캄캄했다. ‘암 전이’가 뜻하는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br>‘이제 정말 힘들어지나?’ 온몸으로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우선 담당의사의 말을 좇아 항암제를 쓰기 시작했다. <br><br>그런데 웬일일까? 항암제를 먹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던 날, 문제가 생겼다. 손발의 살이 다 터졌다.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br>“걸음을 걸으면 발바닥이 모래알을 밟는 것처럼 사각사각 아주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br>곧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암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또다시 한 검사 결과 얼굴뼈로의 암 전이는 오진으로 밝혀졌다. 곧바로 항암제 복용은 중단했지만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걸음을 걸으면 사각사각 기분 나쁜 느낌이 들고 그게 고통스러워서 한 여름에도 양말을 늘 신고 삽니다.”<br><br>그래도 오진이어서 너무나 기쁘다는 황규명 씨. 그로부터 5년이 다돼 가는 지금, 그는 6개월에 한 번씩 다니는 정기검진에서 ‘지극히 정상’이라는 진단을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br>그는 믿고 있다. 암 수술 후부터 꼬박꼬박 실천해온 그만의 항암생활이 큰 도움이 됐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그 방법을 묻자 별 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던 그가 마지못해 알려준 방법은 조금 특별하다. <br>현미잡곡밥에 하루 생즙 3잔, 한방차 등 스스로 정한 생활 원칙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한다. <br><br>황규명 씨는 “아파보니까 건강에 무심했던 지난날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더라.”면서 “육류 안 먹고, 조미료 안 먹고, 인스턴트식품 안 먹고 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것은 암 선고를 받았을 때의 아득한 절망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황규명 씨는 손수 밥을 짓고, 생즙을 짜고 간이 안 된 반찬도 맛있게 꼭꼭 씹어 먹는다. <br><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color: rgb(48, 127, 0);" size="3">황규명 씨의 항암 생활 요법은…</font><br><br><span style="font-weight: bold;">밥은 현미 잡곡밥을 1/3 공기만~ </span><br>현미, 찰현미, 율무, 강낭콩, 작두콩, 보리, 조, 팥 등 다양한 잡곡으로 손수 밥을 지어 하루 세 끼 먹는다. 양은 절대로 많이 먹지 않는다. 1/3공기만 먹는다. 물론 이때 한 시간 이상 꼭꼭 씹어서 먹는 것은 필수! <br><br><span style="font-weight: bold;">하루 3잔 생즙도 손수 갈아서~ </span><br>유기농으로 재배한 신선초, 케일, 돌미나리, 민들레를 생즙으로 갈아서 하루 세 잔 꼭 마신다. 재료를 깨끗이 다듬고 즙을 짜고 하는 일은 손수 한다. <br><br style="font-weight: bold;"><span style="font-weight: bold;">산에 수시로 다닌다</span> <br>집과 가까운 인천의 자유공원, 대공원은 수시로 산책한다. 또 산속에 있는 전국 요양원도 유람삼아 다닌다. 산에 가면 마음이 비워지고 잡생각이 나지 않아서 참 좋단다. <br><br><span style="font-weight: bold;">항암성분 듬뿍 든 한방차도 즐겨 마신다</span> <br>민들레, 당귀, 헛개나무, 오가피 등을 푹 달여서 물처럼 수시로 마신다. 동의보감에 수록된 항암성분 약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다. <br><br style="font-weight: bold;"><span style="font-weight: bold;">육식은 안 하고 반찬도 가려먹는다 </span><br>되도록 육류는 피하고 자연식 식단을 차린다. 조미료, 감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만든 김치와 굽지 않은 생김, 양파는 썰어서 된장에 찍어먹는다. 감자나 고구마, 요구르트, 청국장 등도 자주 먹는 음식이다.<b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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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category><![CDATA[admin]]></category>
									<dc:date>2011-09-02 18:04:35</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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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마, 눈썹, 눈밑까지 백반증으로 힘들었던 이재순 씨 체험담</title>
			<description><![CDATA[<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이마, 눈썹, 눈밑까지 백반증으로 힘들었던 이재순 씨 체험담 </font><br><font style="font-family: Batang; font-weight: bold; color: rgb(255, 51, 0);" size="5">“음식의 힘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font><br><br><span style="color: rgb(0, 153, 255);">확실한 원인도 몰라, 명쾌한 완치법도 없어 고통스러운 증상 백반증. 백납이라고도 불린다. 피부가 하얗게 변색되면서 얼룩덜룩 얼룩을 남기는 증상이다. 의학적인 정의는 “멜라닌 세포의 파괴로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의 백색 반점이 피부에 나타나는 후천적 탈색소성질환”으로 명명돼 있다. 이러한 백반증은 사실 통증도 없고 가렵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미용상 심각한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얼굴에, 눈썹에 하얗게 변색된 점, 설상가상 그것이 점점 커지면서 얼굴, 혹은 몸 이곳저곳을 변색시키는 까닭이다. 그래서 말 못할 고통을 안겨주는 증상 백반증. 눈부신 현대의학으로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레이저 치료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백반증을 조금 독특한 방법으로 이겨낸 사연을 들어봤다. </span><br style="color: rgb(0, 153, 255);"><span style="color: rgb(0, 153, 255);">글 | 이은혜 기자 &nbsp;</span><br><br><br><img alt="01" style="clear:both;margin-right:15px;" src="../../_sys/_upload/image/201108/04/131242701837.jpg" align="left" width="330">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서 외곽으로 조금 벗어나자 띄엄띄엄 민가가 몇 채 보이고,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작은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정갈한 마루,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있는 모습이 고운 인상을 풍기는 사람. 이재순 씨(76세)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세상의 모든 욕심 다 내려놓고 소박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주인공이다. <br>평범한 일상이 주는 행복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기에 오늘의 이 평온함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이재순 씨.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이마의 하얀 점 </font><br>정말 어느 날 갑자기였다.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불현듯 나타났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왼쪽 이마에 모습을 드러낸 백반증은 그렇게 이재순 씨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속도가 무서웠다. 아침에 눈 뜨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br><br>“자고 일어나면 이마에서 눈썹, 눈밑까지 확확 번지는 데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br>부랴부랴 피부과부터 찾았다. 백방으로 수소문 한 끝에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피부과. 광선치료, 약물치료, 주사, 레이저… 다양한 치료법이 총동원되었다. 하지만 백반증은 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번져갔다. <br>안 되겠다 싶었다. 그때부터 좋다는 치료법은 모조리 다해봤다.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수지침 놓기, 뜸뜨기 등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br><br>그래도 좀체 낫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이마에서 시작된 백반증은 눈밑까지 번져 있었고, 이재순 씨의 절망도 깊어갔다.<br>“이 병원, 저 병원, 용하다는 한의원까지 두루 다녀봤지만 하나같이 ‘반드시 고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너무 속상했어요. 다들 ‘어려운 병에 걸렸다.’는 말만 하는데 그게 더 답답하고 절망스러웠어요.” <br>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문득 전해진 소식 하나! 그것은 ‘신의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br><br><table style="clear:both;margin-left:15px;" align="right" cellpadding="0" cellspacing="0" width="300"><tbody><tr><td><img alt="02." src="../../_sys/_upload/image/201108/04/131242701908.jpg" width="300"></td></tr><tr><td style="padding-top:4px;font-size:11px;font-family:dotum;color:#808080;line-height:120%;">이재순 씨는 먹는 것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td></tr></tbody></table><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음식에서 희망을 보다 </font><br>뜻밖의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해졌다. “동생의 남편이 서울에 있는 유명 사립대 교수였는데 어느 날 문득 먹을거리를 한 번 바꿔보라고 권하더군요. 요로법에 관심이 많아 연구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 연구모임에서 제 얘기가 나오자 회원 중 한 명이 현미생채식을 한 번 해보라고 귀띔했다더군요.” <br><br>이때부터 이재순 씨는 조금 독특한 식사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현미밥 혹은 보리밥에 생채식 위주로 먹기 시작했다. <br>“집에서 해먹기 번거로워 현미채식식당에 가서 늘 식사를 했어요. 그곳 음식은 조미료도 거의 사용하지 않아 자극적인 맛이 없고, 야채 중심으로 차린 소박한 시골밥상이었는데&nbsp; 많은 사람들이 이곳 현미생채식을 치료식으로 활용한다는 말을 들어서였습니다.” <br><br>무엇보다 들어서자마자 들었던 주인 아주머니의 말은 이재순 씨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말한다. <br>“백반증은 문제도 아니라며 현미채식을 하면서 체질이 개선되자 백반증은 소리없이 없어지는 것을 많이 봐왔다고 하더군요. 그 말씀은 제게 큰 힘이 됐어요. 어디 한 군데 속 시원히 낫는다는 말을 못 들어봤는데 먹는 밥을 바꾸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이 허황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큰 위로가 되더군요.”<br><br>그래서 한 번 실천해보기로 했다. 이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식당에 가서 현미채식 식사를 했다. 현미밥이나 보리밥에 청국장과 싱싱한 채소, 다시마, 단호박, 피망, 쌈채 등과 마, 우엉, 연근 등 각종 나물로 차려진 밥상을 먹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현미떡과 간단한 과일로 대신했다. <br><br>그렇게 2개월 정도 흘렀을 때였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고 일어나면 확확 번지던 백반증이 딱 멈췄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빛깔도 변해 있었다. 너무나 기뻤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비로소 살맛이 났다. <br>“사실 제가 평생 종교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외모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백반증이 나타나자 그게 아니더군요. 남에게 추하게 보인다는 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면서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되더군요. 그랬던 백반증이 멎으니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습니다.” <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흔적은 조금 남았지만 그래도 행복해~ </font><br>그로부터 7년 남짓 지난 지금, 이재순 씨의 백반증은 어떻게 됐을까? 얼핏 보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이마 부위에 흔적은 조금 남아 있다. <br>하지만 이재순 씨는 걱정하지 않는다. “이마에 조금 남아 있어도 걱정 안 해요. 눈밑까지 내려왔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니까요.”<br><br>그것은 모두 먹는 음식의 덕분임을 이재순 씨는 너무나 잘 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의 삶에도 중요한 덕목 하나가 자리잡았다. <br>먹는 것이 곧 근원적인 약이 된다는 깨우침이 그것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하늘의 일로서 참으로 거룩하고 우주적인 기적으로 여긴다. 절대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br><br>그런 까닭에 음식 하나를 먹을 때도 소중한 친구처럼 여긴다는 이재순 씨. 비록 예전처럼 철저한 현미채식을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음식은 되도록 소박하게 먹고, 적게 먹고, 감사하며 먹는다. 말없이 우리 생명을 살려주는 고마운 존재임을 뼈저린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nbsp; <br>]]></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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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category><![CDATA[admin]]></category>
									<dc:date>2011-08-04 12:04:35</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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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복수·황달 동반한 간경화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서경선 씨 인생고백 “80~90까지는 끄떡없는 몸으로 거듭났어요”</title>
			<description><![CDATA[사업 실패, 그리고 이어진 10여 년의 시련.&nbsp; 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생사의 기로에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된 몸. 그제야 알았다. 돈도, 명예도 잃어버린 건강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래서 오늘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세상에 부러울 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 전주에 사는 서경선 씨(66세)가 그 주인공이다. 중증 간경화에 황달, 복수까지 차오르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그가 지금은 너무도 건강한 모습으로 지난 이야기를 털어놨다.&nbsp; <br><span style="color: rgb(0, 153, 255);">글 | 이은혜 기자</span><br><br><img alt="1" style="clear:both;margin-right:15px;" src="../../_sys/_upload/image/201107/04/130974175043.jpg" align="left" width="330"><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사업 실패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주고…</font><br>불행은 언제나 예고가 없다.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대단지로 재배되고 있던 표고버섯 농장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될 줄. 잡균이 번식하면서 애써 가꾼 표고버섯 수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br><br>그 여파는 실로 컸다. 워낙 투자도 많이 한 터여서 수습 또한 쉽지 않았다. “쫄딱 망했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됐다고 서경선 씨는 말한다. <br><br>이때부터 그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하루아침에 닥친 생활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어지면서 그의 절망은 날로 깊어갔다. <br><br>그런 그에게 위로가 되어준 건 오직 술뿐이었다. 술을 물처럼 마셨다고 한다. 자신의 무능함을,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됫병 술로 달래는 날이 많아졌다. <br>그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을 때 그는 또 다시 닥친 불행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건강, 발목을 잡다 </font><br>사업 실패 후 10여 년 동안 실의에 빠져 살면서 강철 같은 그의 몸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nbsp;<br>“언제부턴가 힘이 없고, 피곤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가 되면서 막연한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더군요.” <br><br>지금도 결코 잊혀 지지 않는 날 2001년 11월14일. 그날 새벽 4시경이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시커먼 액체가 변기에 고였다. 기겁을 했다. 자세히 보니 응고된 피였다. <br>그 후의 일들은 마치 꿈속 같다. 부랴부랴 집에서 가까운 병원을 찾았고 혈액검사, 소변검사, 초음파검사 등 각종 검사가 숨가쁘게 이어졌다. 그리고 의사가 말했다. “중증 간경화에 황달 소인까지 보인다.”면서 ”대학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br><br>청천벽력이었다. 간경화에 황달까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도 간경화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사망선고쯤으로 여긴다. 간경화 - 간암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황달까지 가세했으니 그 가공할 위력이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죽음의 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br>눈앞이 캄캄했다. 억울하기도 했다. 50대 중반에 간경화라니…. 이 병이 장차 그의 인생을 어떻게 헝클어놓을지 생각만으로도 무섭고 두려웠다. <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화순행, 희망을 보다! &nbsp;</font><br>대학병원에 가보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동네 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다. 어려운 집안형편에 대학병원은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동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고 알부민 주사를 맞으며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br>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느닷없이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숨이 가쁘고 온몸이 붓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먹을 수조차 없는 상태, 발등은 퉁퉁 부어서 한 번 꾹 누르면 누른 자국이 좀체 없어지지 않았다. <br><br><img alt="2" style="clear:both;margin-left:15px;" src="../../_sys/_upload/image/201107/04/130974175114.jpg" align="right" width="300">“그러자 아마도 다 죽게 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나 봐요. 광주에 사는 사촌형이 조카와 함께 문병을 왔더군요. 와서 보시고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시더니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그러더군요.” <br>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온 사촌형은 무작정 그를 전남 화순에 있는 약국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간경화가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br><br>“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병원에서도 치료가 안 되는데 약국에서 무슨 치료를 해줄 수 있을까 솔직히 의심스러웠어요.” <br>그러나 사촌형의 끈질긴 애원에 하는 수 없이 가게 된 화순행. 서경선 씨는 말한다. “그 길은 새 생명을 찾은 길이었다.”고 회고한다. &nbsp;<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바보죽+붕어즙+녹즙은 내 생명의 은인</font><br>전남 화순에서 만난 사람은 바보요법으로 유명한 정용재 약사였다. 지금도 서경선 씨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간경화에 복수, 그리고 황달까지 가세해 죽음의 나락으로 내몰렸던 그를 다시금 살려낸 은인이기 때문이다. <br>그 비결은 뭐였을까? 이 물음에 서경선 씨는 당시 자신이 실천했던 세 가지 치료기법을 소개한다. <br><br><span style="color: rgb(255, 51, 0);">▶ 하루 세 끼를 죽으로 먹었다. </span><br>찹쌀, 검은콩 볶은 가루, 검정참깨 볶은 가루, 율무 볶은 가루 등 5~6가지 재료로 죽을 쑤어 먹기 시작했다. 짜게도 맵게도 먹지 말라고 해서 일체 간을 하지 않고 무염식 죽을 먹었다고 한다. &nbsp;<br>“죽을 먹을 때는 꼭꼭 씹어서 먹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습니다. 약사님은 늘 웃고 사는 바보처럼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죽을 먹어야 한다면서 이름도 바보죽이라고 하더군요. ” <br><br><span style="color: rgb(255, 51, 0);">▶ 붕어즙과 표고버섯을 중탕해서 수시로 마셨다. </span><br>건강원에서 즙을 낸 뒤 냉동 보관해 두고 하루에 서너 번씩 수시로 마셨다.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br><br><span style="color: rgb(255, 51, 0);">▶ 녹즙도 마셨다. </span><br>돌미나리와 사과 1/2개로 녹즙을 짜서 10분 이상 동안 씹으면서 천천히 마셨다. <br>“이 세 가지 방법을 병행하면서 약사님이 권한 바보요법을 열심히 실천했습니다. 늘 웃고 살고, 욕심없이 살고, 바보처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br>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nbsp;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서경선 씨의 몸 상태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혈액검사와 초음파검사 결과 간수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게 나왔던 것이다. <br><br>무엇보다 거동조차 힘들었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그 기쁨은 실로 컸다. 공원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간간이 외출도 할 수 있게 됐다. 신이 났다. 그래서 더 열심히 실천했다는 서경선 씨. 그렇게 1년 남짓 꾸준히 실천했을 때 그의 몸에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br>“영상의학과 의사 선생님이 혈액검사, 초음파검사를 해보고 ‘당신은 간경화 환자가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br>정상적인 간으로 회복됐던 것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2004년 4월은 서경선 씨 삶에서 제2의 인생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br><br><font style="font-weight: bold;" size="3">80~90까지는 끄떡없는 몸 </font><br>2004년 4월의 봄.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같이 서경선 씨의 삶도 새롭게 시작됐다. 정상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됐고, 일도 할 수 있게 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건강한 몸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br>그렇게 살아온 지 어언 7년,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초음파와 혈액검사를 하고 있지만 그의 건강은 이상무다. 간경화에 대한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간은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br><br>그런 그의 지금 생활은 예전과 분명 다르다. 흰밥 대신 콩밥을 먹고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 시간 나는 틈틈이 운동도 한다. 그런 덕분인지 팔은 무쇠 알통이다. 지금 같으면 80~90까지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br>그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 말을 잊고 산 덕에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여러분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br>이 말이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아마도 힘든 세월을 살아낸 그의 고통이 승화돼 있기 때문은 아닐까? <br>]]></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1086</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category><![CDATA[admin]]></category>
									<dc:date>2011-07-04 10:09:50</dc:date>
			<dc:subject></dc: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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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동맥 경화증에서 기사회생~ 성효경 약사가 사는 법</title>
			<description><![CDATA[<P><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0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11/03/128877472389.jpg" width=300>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좋지 않은 소식 하나! 약업계의 한 원로 약사에 관한 소식이었다. 경동맥 수술로 힘든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는 풍문이었다. 적잖이 놀랐다. 평소 너무도 건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다. </P>
<P>&nbsp;</P>
<P>그는 우리나라 건강기능성식품업계의 대부로 통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경동맥 경화증이라니…. 좀체 믿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그는 너무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니 예전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성효경 약사(66세). </P>
<P>&nbsp;</P>
<P>국내 건강기능성식품 업계를 주도했던 장본인. 화려한 이력으로 늘 관심의 대상이었던 그가 경동맥 경화증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기사회생한 주인공으로 또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P>
<P><BR><STRONG>예고도 없이 닥친 불행 <BR></STRONG>그날은 친구들과 등산에 나선 길이었다. 왼쪽 눈이 이상했다. 사물이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20층 건물이 10층까지만 보이고 그 위로는 보이지 않는 증상. ‘이게 뭐지?’ 불안감이 들 즈음, 그 증상은 이내 사라졌다. 다시금 멀쩡해졌고 ‘별일 아니겠지.’ 안심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목욕탕에서 또다시 그 불쾌한 증상이 나타나자 성효경 약사는 직감했다. ‘문제가 생겼구나!’</P>
<P><BR>“MRI를 찍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왼쪽 경동맥은 90% 막혀 있고 오른쪽 경동맥도 50% 정도 막혀 있다고 하더군요.”<BR>정말 난데없는 통보였다. 동맥이 그렇게 막힐 때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금 높은 혈압은 혈압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정상혈압을 유지해 왔고, 콜레스테롤약과 고지혈증 약도 꾸준히 먹어 혈액 속의 총지방 수치도 언제나 정상이었다. </P>
<P><BR>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동맥 경화증이라니… 동맥이 90%나 막힐 때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니….<BR>&nbsp;아무런 준비도 없이 경동맥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위험한 수술을 받기 위해 2009년 1월 성효경 약사는 수술실로 향했다. </P>
<P>&nbsp;</P>
<P><STRONG>수술은 성공적, 그러나 남겨진 의문 하나! <BR></STRONG>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식물인간만큼은 되지 않게 해달라.’ 빌면서 수술실로 향했다는 성효경 약사. <BR>4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을 때 손발부터 꼼지락거려 보았다. 움직였다. 살았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고민의 시작점이 됐다는 게 성효경 약사의 말이다. </P>
<P><BR>“곰곰이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어요. 평소 혈압약도 꾸준히 먹어 정상 혈압을 유지하고 있었고, 콜레스테롤약과 고지혈증약도 꾸준히 먹어 혈액 속의 총지방 수치도 정상이었는데 혈관은 막혔고, 또 수술을 해야 했으니까요.” </P>
<P><BR>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상식은 약으로 혈압 낮추고 핏속의 콜레스테롤을 정상으로 유지하고 핏속의 총 지방을 정상으로 유지하면 혈관질환은 예방된다는 거였다.&nbsp; <BR>그런데 아니었다. 너무도 충실히 그 방법을 따르고 있었지만 경동맥 중 하나는 막혀서 수술을 해야 했고, 또 다른 하나는 50%나 막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 있었다. </P>
<P><BR>‘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BR>그것은 성효경 약사에게 던져진 너무도 절박한 화두였다. 그런 그에게 약학박사 친구가 권해준 한 권의 책은 한 줄기 빛이 되었다. </P>
<P>&nbsp;</P>
<P><STRONG>라이너스 폴링요법, 해답을 주다 <BR></STRONG>유일하게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주인공, 근대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 라이너스 폴링 박사가 평생 연구의 결정판으로 발표했던 논문 &lt;심혈관 치료를 위한 통합이론&gt;은 성효경 약사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일반 상식을 송두리째 깨버린 이론이었다. <BR>“지금까지 우리는 혈액 속에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질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지면 그것이 혈관을 막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이너스 폴링 박사는 혈관질환을 일으키는 동맥경화의 원인은 결코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질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P>
<P><BR>● 라이너스 폴링 박사는 동맥경화의 원인은 혈관 내막에 생긴 염증이나 상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BR>● 혈관 내막에 염증이나 상처가 있으면 혈관 내막이 약해지면서 터질 수 있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질이 염증이나 상처가 난 혈관 위에 덧씌워지면서 일종의 보호막 구실을 한다는 이론이었다. <BR></P>
<P>이 이론은 성효경 약사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점을 말끔히 해소시켜 주었다. 콜레스테롤치도 정상, 지방수치도 정상이었지만 경동맥 경화가 일어난 이유를 비로소 알게 해주었던 것이다. <BR>그래서 열광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혈관에 염증이나 상처를 낼까?’</P>
<P><BR>“그것은 바로 독성물질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먹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생활하는가에 따라 만들어지는 독성물질이 혈관 내막에 염증을 일으키는 원인물질이었던 겁니다.”</P>
<P>따라서 혈관질환을 예방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 몸속으로 독성물질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또 혈관 내막을 이루고 있는 결합조직을 튼튼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압축됐다. </P>
<P><BR>
<TABLE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right>
<TBODY>
<TR>
<TD><IMG alt=02.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11/03/128877472405.jpg" width=30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성효경 박사가 개발한 C-포뮬라는 혈관 내막의 결합조직을 튼튼히 하는 건강기능성식품이다.</TD></TR></TBODY></TABLE>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성효경 약사의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몸에 독성물질을 만드는 생활방식은 철저히 차단했다. 비생명적으로 사육되는 육류 섭취 금하기, 튀김음식 먹지 않기, 친환경채소와 과일 먹기, 철두철미하게 고마워하기 등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실천한 덕목들이란다. <BR>그러면서 또 하나 목숨 걸고 실천한 것은 라이너스 폴링요법을 하나의 제품으로 구현한 포뮬라를 섭취하기 시작한 것! 혈관 내막의 결합조직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였다. </P>
<P>&nbsp;</P>
<P><STRONG>‘C-포뮬라’ 개발로 관심 집중 <BR></STRONG>혈관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혈관 내막의 결합조직을 튼튼히 해야 한다! <BR>라이너스 폴링 이론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라이너스 폴링 박사는 하루에 비타민 C는 6g 이상, 라이신은 5g 이상, 프롤린은 1g 이상을 반드시 섭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폴링요법 포뮬라(처방) 제품이 미국의 대체의학계에서 중요하게 통용되고 있다. </P>
<P><BR>&nbsp;성효경 약사는 이 제품에 주목했다. 수입이 안 되고 있었지만 직접 구해서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났을 때 색다른 시도를 해보기에 이른다. 수술 후에도 여전히 먹어야 했던 콜레스테롤약과 고지혈증약을 더 이상 먹지 않기 시작했다.</P>
<P><BR>“언제까지 약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콜레스테롤약이나 고지혈증 약 모두 엄밀히 말하면 우리 몸의 정상적인 신진대사를 방해하는 약들이었으니까요.” <BR>그렇게 3개월이 지나고, 6개월마다 하는 병원 검진 날, 혈액검사 결과는 놀라웠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고지혈증 수치도 모두 정상으로 나왔고, 몸무게 또한 72kg에서 62kg으로 줄어 있었다. </P>
<P><BR>성효경 약사는 전율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폴링요법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리라! <BR>미국 제품은 우리나라 식품법규상 맞지 않아 정식으로 수입할 수 없다는 점도 이 같은 결심을 부추겼다. 그리고 2010년 2월 하나의 결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BR>비타민 C 1g, 라이신 800mm, 프롤린 200 mm에 보조영양물질 5~6종을 추가하여 혈관 내막의 결합조직을 튼튼히 하는 일명 ‘C-포뮬라’를 개발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P>
<P><BR>이렇게 개발된 C-포뮬라를 하루에 6포씩 복용한다는 성효경 약사. 그런 때문일까? 6개월마다 하는 정기검진에서 그는 새희망을 본다고 말한다. 혈관초음파 검사를 해보면 수술한 혈관은 아주 깨끗해서 기쁘고, 50% 막혔다던 오른쪽 경동맥도 48%로 경화 정도가 낮아지면서 그를 살맛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BR>그래서 라이너스 폴링요법을 재현하여 새롭게 선보이고 있는 C-포뮬라는 그의 남은 생애 삶의 목표가 되고 있다.</P>
<P><BR>오늘도 지난 경험담을 블로그(momgil. org)에 올리고 또 전국 강의를 다니며 예전보다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는 성효경 약사.<BR>“혈관질환은 모르면 무서운 병이지만 진실을 알고 바로 대처하면 전화위복의 행복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그는 “결합조직을 튼튼히 하는 것이 모든 건강의 기초가 된다.”고 말한다. <BR>그래서 지금 그의 꿈도 하나다. 남은 생애, 심혈을 기울여 &lt;결합조직 건강법&gt;의 전도사가 되고 싶어한다. 그것은 반드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로 여기고 있다. </P>
<P><BR>문의 : 031-457-0034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843</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11-03 18:00:38</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자궁경부암 후유증 이겨낸  안효주 씨 체험담</title>
			<description><![CDATA[<P><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10/05/128624486659.jpg" width=300>“자유롭게 배설할 수 있는 것만큼 큰 행복도 없어요” </P>
<P>자궁경부암? 쉽게 생각했다. 치료도 잘 되고 예후도 좋다는 의사의 말은 큰 위안이 됐다. 무엇보다 비교적 일찍 발견된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P>
<P>&nbsp;</P>
<P>하지만 수술과 항암제로 암세포는 없어졌지만 예기치 못한 후유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몰랐었다. 그렇게 힘든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줄. 배설기능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P>
<P>&nbsp;</P>
<P>배뇨감을 느낄 수 없는 몸.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조차 용납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P>
<P><BR>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고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하루가 살맛난다고 말하는 사람 안효주 씨(57세). 그런 그녀가 고민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털어놓은 자궁경부암 후유증 극복기를 소개한다. </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P>
<P>&nbsp;</P>
<P><BR><FONT size=3><STRONG>엎친 데 덮친 불행 </STRONG></FONT><BR>불행은 종종 악의적이다. 언제나 친구하여 오는 경우가 많다. 안효주 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BR>어느 날 갑자기 간암 진단을 받고 손써 볼 시간조차 없이 유명을 달리한 남편. “남편은 30대 초반부터 간염을 앓아온 간염 보균자였어요. 그런데 그 증상이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간경화에서 간암으로 진행이 되면서 진단 받은 지 한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싶더군요.” <BR>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줄 짐작조차 못했었다. 그 여파 때문이었을까? </P>
<P><BR>남편을 여의고 1년 정도 지난 2007년 6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소변을 보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BR>덜컥 겁이 났지만 ‘병원에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세 달이 훌쩍 흘러갔다. 그래도 계속 하혈을 하자 안 되겠다 싶었다. 가까운 산부인과에 갔더니 진찰을 해본 의사가 말했다. “자궁에 염증이 심한 것 같다.”고. 그러면서 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치료를 위한 각종 검사가 이어졌다. 소변검사, 자궁검사가 행해졌다. 그런데 의사가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했다. </P>
<P><BR>조직검사 결과는 10일 정도 지났을 때 나왔다. 담당의사를 만나러 갔을 때 직감했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구나.’<BR>&nbsp;예상은 적중했다. 담당의사는 검사 결과 자궁경부암 조짐이 보인다면서 큰병원으로 가보는&nbsp; 게 좋겠다고 말했다. <BR>그래서 간 곳은 안산에 소재한 대학병원. 곧바로 입원을 하고 전반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자궁경부암 1~2기 정도 된다는 진단이었다. 그것은 2007년 10월 초순의 일이었다. </P>
<P><BR><FONT size=3><STRONG>자궁경부암 1~2기 진단을 받다 </STRONG></FONT><BR>자궁경부암 진단을 받고도 의외로 담담했다고 말하는 안효주 씨. <BR>“여성암 중에서 자궁경부암은 비교적 치료가 잘 되고 예후도 좋다고 하니까 그리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어요.” <BR>하지만 치료를 시작하자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그녀는 조금 색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수술 대신 약으로 다스려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중국에 암을 약으로 완치시키는 곳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서였다. </P>
<P><BR>“수술을 하면 자궁을 들어내야 하고 난소, 나팔관도 들어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못내 걸리더군요.” <BR>그래서 택한 중국행. 세 차례 정도 중국을 드나들며 약을 지어와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궁금했다. 혹시 암세포가 사라진 건 아닐까? </P>
<P><BR>들뜬 마음으로 다시 찾은 병원. 하지만 검사 결과는 참담했다. MRI 검사 결과 암세포는 더 커져 있었고, 2기 말이라는 진단도 함께 나왔다. 의사는 서둘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암세포가 너무 커서 2회 정도의 항암치료부터 해야 했다. <BR>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 의사가 권하는 대로 항암치료부터 시작했다. 붕붕 떠다니는 기분, 기운 없고,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카락은 뭉텅뭉텅 빠지고… 다들 겪는다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은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고통을 견뎌내며 2회의 항암치료가 끝났을 때 그녀는 수술대 위에 올랐다. </P>
<P>&nbsp;</P>
<P><FONT size=3><STRONG>수술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STRONG></FONT><BR>수술해서 암 세포를 없애면 모든 고통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수술은 결코 치료의 끝이 아니었다. 자궁을 들어냈다는 허전함도 잠시.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BR>“대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고통이었어요. 배뇨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으니까요.” </P>
<P><BR>자궁 경부가 방광과 가깝다 보니 배뇨와 관련된 신경도 함께 제거돼 버린 탓이었다. 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변을 보는 것도, 소변을 보는 것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느낌 없이 소변이 나왔고, 대변도 나왔다.<BR>“그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어요. 자존심도 상하고 말 못할 수치심도 느껴지고… 그래도 살아지는 것이 세월이더군요. 소변을 보고 싶다는 느낌조차 없는 상태에서 차츰차츰 시간에 맞춰 소변 보는 연습도 하면서 그럭저럭 적응해가기 시작했으니까요.” </P>
<P><BR>하지만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외출 한번 하려 해도 쉽지 않았고, 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BR>“그래도 그 정도는 견딜 만했어요. 수술 후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는 장이 탈장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까요. 소변 볼 때 배에 힘을 너무 많이 줘서 그렇게 됐다더군요.” <BR>다행히 탈장된 장은 수술을 통해 봉합됐지만 그녀에게 남겨진 고통의 무게는 여전했다. 배뇨곤란은 여전히 그녀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살아내야 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다고 좋아라 한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P>
<P>&nbsp;</P>
<P><FONT size=3><STRONG>
<TABLE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right>
<TBODY>
<TR>
<TD><IMG alt=2.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10/05/12862448668.jpg" width=30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자궁경부암 수술로 배뇨장애를 겪은 안효주 씨는 콩 유산균 덕분에 밝은 미소를 되찾았다.</TD></TR></TBODY></TABLE>다시금 부르는 행복 찬가 </STRONG></FONT><BR>2010년 8월 현재, 안효주 씨는 하루하루가 꿈만 같다고 말한다.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고, 사람들을 만날 때 불안감도 말끔히 없어졌다고 털어놓는다. <BR>배뇨감을 느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배뇨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주르르 흘러내리던 소변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하루하루 살맛이 난다고 말한다. 그 비결을 묻는 질문에 안효주 씨는 “장기능을 좋게 해준 덕분인 것 같다.”고 말한다. </P>
<P><BR>“그동안 배뇨감을 회복하기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예요. 복근운동에 괄약근운동에 호흡운동까지 좋다는 방법은 모조리 다해보았지만 좀체 효과를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서너 달 전부터 콩을 발효시켜 만들었다는 유산균을 먹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BR>어렴풋하게 배뇨감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소변을 시원하게 볼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신의 선물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털어놓는다.</P>
<P><BR>이제는 웬만큼 소변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무너졌던 그녀의 자존심도 회복됐다고 말하는 안효주 씨. <BR>사람이 배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또 새롭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가능한 한 충실히 살려고 최선을 다한다.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814</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10-05 10:55:29</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난소암·전립샘암 이겨낸 한 가정의 작은 기적</title>
			<description><![CDATA[<p>불행은 언제나 예고가 없다. 너무도 다복했던 가정. 모두들 부러워했다. 의사·약사 아들에 교사 딸…. 전남 광주에 사는 장정렬 할아버지(79세)는 늘 자식농사 잘 지었다며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누가 시샘이라도 한 걸까? </p>
<p>&nbsp;</p>
<p>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 시작은 교사이던 딸이 암 판정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미스코리아 뺨치게 예뻤던 딸, 그 딸이 난소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절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또한 전립샘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암=불치병으로 받아들이는 현실 속에서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p>
<p>&nbsp;</p>
<p>한 집안에 암 환자가 둘…모두들 끌끌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고, 가족들의 절망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 가정에 오늘은 행복이 넘친다. 암의 고통서 벗어나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또 다른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난소암을 이겨낸 딸은 끝끝내 얼굴 공개를 꺼려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거듭났고, 팔팔한 노익장을 자랑하는 장정렬 할아버지는&nbsp; 지난 5년 세월의 작은 기적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nbsp; </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p>
<p><br><font size="3"><strong><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1"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9/01/12833344909.jpg" align="left" width="300">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 </strong></font><br>어릴 적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장정렬 할아버지에게 있어 큰 딸 장수연 씨는 언제나 자랑거리였다. <br>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자신의 뒤를 이어 학교 선생님이 된 것도 뿌듯했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습도 장정렬 할아버지에게 언제나 큰 기쁨이었다. <br>그런데 왜였을까? 그런 딸이 언제부턴가 배가 불러온다며 걱정스러워 했다. </p>
<p><br>“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여자 나이 사십이 넘으면 뱃살도 찌고 하잖아요.”<br>하지만 자꾸만 배가 불러왔고, 결국 동네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을 받기에 이르렀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말했다. 탈장이라며 별 것 아니라고 했다. </p>
<p><br>“그러자 성형외과 의사인 아들이 큰병원에 가서 다시 한 번 더 검사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서 한 번 더 검사를 했어요.” <br>대학병원의 진찰 결과도 탈장으로 나왔다. 곧바로 수술 일정이 잡히고, 수술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nbsp; </p>
<p><br>“갑자기 병원 측에서 복강에 아기 머리 만한 혹이 있다면서 악성으로 의심되니 산부인과로 전과를 하겠다고 그러더군요.” <br>기가 막혔다. 그러나 어쩌랴! 부랴부랴 산부인과로 옮겨졌고 또다시 각종 검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청천병력이었다. 난소암 3기 말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던 것이다.</p>
<p>&nbsp;</p>
<p><font size="3"><strong>난소암 3기 딸은 치료를 거부하고 </strong></font><br>난소암 3기 말로 판정을 받은 딸. 언제나 뿌듯한 자랑거리였던 딸이 난소암 3기 판정을 받자 장정렬 할아버지의 상심은 실로 컸다. 그런데 설상가상 딸이 치료를 거부하고 나서자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 말한다. <br>“딸이 그러더군요. 3기 말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고. 그러면서 수술을 안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억장이 무너지더군요.” </p>
<p><br>나오는 건 울음뿐이었다. 통곡밖에 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다는 게 가슴 미어졌다. 그래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치료를 받자고. 이 아비의 소원이니 수술도 받고 항암치료도 하자며 통사정했다. <br>“그런 아비의 모습이 너무 불쌍했든지 수술을 하겠다고 나서더군요.” <br>그렇게 해서 수술은 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런 항암치료가 남아 있었고 방사선치료도 해야 했다. </p>
<p><br>너무도 힘든 항암치료. 그 탐스런 머릿결은 다 빠져버렸고,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는 딸애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딸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장정렬 할아버지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br>그 때문이었을까? 딸의 고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시련이 장정렬 할아버지 앞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p>
<p>&nbsp;</p>
<p><font size="3"><strong>엎친 데 덮친 또 하나의 불행 </strong></font><br>힘든 항암치료로 고통스러워하는 딸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모처럼 친구들 10여 명과 함께 산행에 나선 길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친구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약한 오줌줄기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p>
<p><br>“모두들 칠십 중반을 넘어선 나이다 보니 다들 오줌줄기가 약해지고 또 방울방울 나오는 것이 은근히 걱정이 됐나 봐요. 한 친구가 이참에 비뇨기과에 가서 검사를 한 번 받아보자고 제안을 하더군요. 때마침 비뇨기과 의사를 아들로 둔 친구가 있어 모두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p>
<p><br>검사 결과는 바로 나왔다. 모두들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좋아라 했다. <br>“그런데 의사가 제게는 좀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그것도 놀란 모습으로. 검사결과 PSA수치가 78로 나왔다면서 다른 검사를 좀 더 해보자고 하더군요.” </p>
<p><br>처음에는 몰랐다. PSA수치가 뭘 뜻하는지. 하지만 그것이 전립선 특이항원 검사이고 또 이 수치가 높을 경우 전립선암일 가능성이 높다는 건 오래지 않아 알게 됐다. <br>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PSA수치는 0~4 정도로 나오는데 장정렬 할아버지는 무려 78이 나왔으니 의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p>
<p><br>곧바로 조직검사에 들어갔다. 전립샘 조직 6군데를 떼어서 검사를 의뢰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 자리. 의사는 말했다. “전립샘 6군데를 조직검사 했는데 다 암세포가 발견되었습니다.” <br>또 암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암 때문에 말 못할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 또한 암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p>
<p><br>“안 되겠다 싶더군요. 곧바로 서울에서 성형외과를 하는 아들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그러자&nbsp; 서울로 바로 올라오라고 하더군요.” <br>서울로 상경한 이후의 일은 숨가쁘게 진행됐다. 진료 일정이 잡히고, 또다시 CT, MRI 등 각종 검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진료를 마친 의사가 말했다. 수술은 하지 말고 약물치료를 해보자고. <br></p>
<p>“하지만 아들한테는 암세포가 등뼈까지 전이가 됐다면서 3개월을 살기 어렵다고 했나 봐요. 그리고 나이도 70대 중반이니까 수술해서 고통 받느니 차라리 편히 살다 가도록 하는 게 더 좋겠다고 했다더군요.” <br>그렇게 해서 시작된 약물치료. 하루 한 알씩 꼬박꼬박 약을 먹어야 했고, 배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주사를 놓았다고 한다. 이때 장정렬 할아버지의 연세는 74세였다. </p>
<p>&nbsp;</p>
<p><font size="3"><strong>아들은 내 삶의 구세주 </strong></font><br>
<table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cellpadding="0" cellspacing="0" align="right" width="300">
<tbody>
<tr>
<td><img alt="2."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9/01/12833344911.jpg" width="30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장정렬 할아버지는 성형외과 의사인 아들 장덕규 원장을 구세주라고 말한다. 아들의 면역치료법이 자신을 살렸다고 믿고 있다.</td></tr></tbody></table>무엇보다 딸이 아비의 몹쓸 병을 자기 탓으로 돌려 병세가 더욱 악화되지 않을까 그것이 더 걱정스러웠다고 말하는 장정렬 할아버지. <br>딸에게는 병명을 숨기고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이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자식 중 후회와 자책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아들이 있었다. 성형외과 의사인 장덕규 원장은 아버지의 병이 자신의 잘못인 듯 괴로워했다. </p>
<p><br>“피검사만 미리 했어도 얼마든지 상황이 악화되는 걸 막을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무심한 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고 또 화가 났어요.” <br>그래서 결심했다. 그동안 숱한 임상 자료와 논문을 통해 연구해온 면역치료법을 아버지와 누님에게 시도해보기로. </p>
<p><br>수술조차 할 수 없는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또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후에는 달리 해볼 수 있는 치료법이 없는 누님이었기 때문이었다.<br>그런 상황에서 장덕규 원장은 일명 ‘면역치료’로 알려진 자연요법을 총동원했다고 말한다. 고용량비타민 C요법, 태반요법, 미슬토요법, 산소치료법, 온열요법 등이 총망라됐다. </p>
<p><br>그런 덕분이었을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장정렬 할아버지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들을 구세주라고 말하는 장정렬 할아버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p>
<p>&nbsp;</p>
<p><font size="3"><strong>다시금 부르는 생명의 찬가 </strong></font><br>딸은 난소암 3기 말 판정을 받고, 자신은 전립샘암 진단을 받았던 장정렬 할아버지. <br>한 집안에 암 환자가 둘이나 되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절망했던 그가 오늘은 웃는다. <br>다시금 건강을 되찾아 누구보다 건강해진 딸을 보는 것도 가슴 벅차고, 자신의 좋아진 몸도 너무나 기쁘다. 이 모두가 꿈만 같다. </p>
<p><br>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다. 딸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도, 또 자신이 건강을 회복한 것도 아들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br>“난소암 진단을 받았던 딸은 7년이 지난 지금 등산도 다니고 아주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어요. 저 또한 전립샘암 진단을 받은 지 5년이 흐른 지금 암세포는 사라지고, 너무도 건강해져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예요.” </p>
<p><br>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다. 2010년 5월 27일 병원 검사 결과 전립샘암 표지자 수치인 PSA 수치가 0.01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무려 78이던 전립샘암 표지자 수치가 0.01로 떨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br>이 모두가 다 아들 덕분이라고 말하는 장정렬 할아버지. 딸이 난소암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그의 전립샘에서 암세포가 사라진 것도 모두 아들의 면역치료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아들은 그에게 다시없는 자랑이자 구세주라고 말한다.&nbsp;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797</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9-01 18:08:17</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quot;전립샘암이 사라졌다&quot; 변일남 씨 체험고백</title>
			<description><![CDATA[<P><STRONG><FONT size=3>“암 발생은 오히려 전화위복… 더 건강해졌어요” </FONT></STRONG></P>
<P><STRONG>2009년 7월 느닷없이~ 암선고 <BR></STRONG><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7/03/127813464067.jpg" width=300>일흔을 넘어선 나이… 이 나이쯤 되면 허리 아프고, 관절 안 좋고… 다들 한두 군데 아픈 곳은 있기 마련이다. <BR>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사는 변일남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혈압이 높아 10여 년 동안 혈압약을 먹어왔고 고지혈증도 있었다. 회사에서 매년 하는 건강검진을 해보면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게 나왔고 동맥경화도 있었다. 그래도 나이 탓이려니 참으며 살았다. </P>
<P><BR>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부쩍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이었다. 친구들은 “나이 들면 다 그렇다.”며 “별 일 아니다.”고 했지만 하루에 20회 이상 소변을 보게 되자 덜컥 겁이 났다.&nbsp;&nbsp; </P>
<P><BR>“안 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동네에 있는 비뇨기과에 가서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받아보았습니다.” <BR>그런데 검사 결과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의사는 소변이 덜 나오게 하는 약을 처방해줬다. </P>
<P><BR>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여전히 화장실 가는 횟수는 줄어들지 않았고, 하루 20회 넘게 소변을 봐야 하는 고통은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BR>“그래서 다시 다른 병원에 갔어요. 또다시 혈액검사, 소변검사를 하더군요.” <BR>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왔다.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영 심상찮았다. “혈액 수치가 높다.”면서 “전립샘비대나 전립샘암일 가능성이 있으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던 것이다. </P>
<P><BR>그제서야 부랴부랴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온가족의 걱정 속에서 여러 가지 검사가 진행됐다. 조직검사, 혈액검사, MRI, CT촬영 등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검사가 이어졌다. <BR>그리고 일주일 뒤, 온가족이 있는 자리에서 의사는 말했다. “전립샘의 12군데를 조직검사 했는데 4군데서 암세포가 발견되었습니다.” </P>
<P><BR>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암이라니… 그 무서운 암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온가족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의사가 말했다. 치료법은 수술법과 항암제, 방사선치료가 있는데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BR>“의사가 그러라고 하니 수술을 해야 되나보다 했어요.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딸이 수술을 하면 후유증 같은 없느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러자 의사가 말하길 후유증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P>
<P><BR>평생 기저귀를 차고 살아야 되는 일이었다. 또 소변줄기도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BR>이 말을 들은 변일남 씨는 등골이 오싹해지더라고 말한다. <BR>그는 결국 수술이 여의치 않으면 항암치료라도 꼭 받으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병원문을 나섰다고 한다. 그것은 지난 2009년 7월 21일의 일이었다. </P>
<P>&nbsp;</P>
<P><STRONG>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의외의 선택 </STRONG><BR>평생을 기저귀 차고 살아야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그래도 의사의 말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안 해서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어쩌지.’ 변일남 씨의 고민은 깊어갔다. 가족들도 쉽사리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nbsp; </P>
<P><BR>“그런데 그때 딸이 말하길 칠십이 넘으면 암도 잘 안 큰다면서 수술해서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보다 한 6개월 정도 자연요법을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BR>자연요법? 조금 낯선 단어였다. 하지만 딸이 권하는 거라 믿음이 갔다고 한다. </P>
<P><BR>옆에 앉아있는 딸 변혜경 씨(43세)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사실 저도 한때 건강이 안 좋아 심한 고통을 겪은 적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1세대 IT업계에 종사하면서 몸을 혹사했더니 식욕부진, 자율신경실조증, 호르몬불균형 등으로 온몸이 망가져 회사까지 그만둬야 했으니까요. 그때 깨달은 것이 건강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이것저것 건강지식도 습득하고 건강과 관련된 정보도 눈여겨보게 되면서 어느 정도 건강의 기초는 꿰고 있는 정도는 됐어요.” </P>
<P><BR>그런 그녀가 아버지 변일남 씨에게 권한 것은 신선한 야채와 과일 위주로 먹을거리부터 바꾸게 했다. 그리고 또 하나! 키토산으로 만든 건강기능성식품도 드시게 했다. 키토산올리고당을 복용하게 하고 키토산골드차를 물처럼 드시게 했다.<BR>변혜경 씨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처럼 키토산의 항암효과가 아버지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P>
<P><BR><STRONG>단식원 체험은 잊지 못할 구세주 </STRONG><BR>딸의 말을 믿고 수술 대신 자연요법을 선택한 변일남 씨. 그런 그에게 평생 처음 해본 단식체험은 지금도 잊지 못할 구세주로 남아 있다. <BR>딸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자연요법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단식은 칼 안 대는 수술이라면 평택에 있는 단식원에 가자고 권했을 때만 해도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고 한다. </P>
<P><BR>“밥을 굶는 일은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nbsp; 말도 못 붙이게 했습니다.” <BR>그러나 온 가족이 나서서 단식프로그램에 참가해 보자고 하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BR>평생 처음 해보는 단식은 쉽지 않았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죽을 맛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내 보고 참고, 자식 보고 참고, 또 손녀 보고 참았다. 3일째 되면서부터 견딜 만했다고 한다. </P>
<P><BR>이러한 단식과 함께 다양한 건강프로그램도 함께 실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피부를 숨쉬게 하는 풍욕을 하고 된장찜질, 겨자찜질이라는 것도 해보았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냉탕과 온탕을 교대로 하는 냉온욕이라는 것도 했다. <BR>그렇게 6박 7일의 프로그램을 끝냈을 때 변일남 씨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생활하고… 어렴풋이나마 그 길을 찾게 되었다고 말한다. </P>
<P>&nbsp;</P>
<P><STRONG>180도 달라진 생활, 오직 한 가지 일념으로~ </STRONG><BR><IMG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alt=3 align=righ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7/03/127813464201.jpg" width=300>단식 체험 후 변일남 씨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보다 철저한 자연요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하루의 생활은 규칙적이고, 절도 있게 짜여졌다. 먹는 것, 생활방식, 삶의 태도도 바뀌었다. 전립샘암 선고를 받고 병원 치료를 포기한 그가 목숨 걸고 실천한 자연요법은 다음과 같다. </P>
<P>&nbsp;</P>
<P>● 하루 세 끼 오곡가루 생식을 먹기 시작했다. 오곡가루를 반죽해서 김이나 상추에 싸서 먹었다고 한다. <BR>● 철저한 생채식을 했다. 고기, 생선까지도 금했다. 채소와 과일은 반드시 유기농으로 먹었다. 야채, 과일을 씻을 때는 소금과 식초로 깨끗이 씻어서 먹었다. <BR>● 키토산과 키토산 골드차도 꾸준히 먹었다. <BR>● 전립샘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토마토는 특히 많이 먹었다. 토마토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껍질을 벗긴 뒤 썰어서 올리브기름을 뿌려서 먹었다고 한다. <BR>● 과일을 먹을 때는 효소가 많이 들어있는 사과, 키위, 감 등을 많이 먹었다. <BR>●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풍욕을 했다. 옷을 모두 벗고 20초 있다가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1분 있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늘려가는 방식이다. 풍욕은 피부호흡을 잘 되게 하여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열심히 실천했다. <BR>● 낮 시간 동안에는 주로 산을 찾았다. 소요산, 관악산에 자주 올라 산의 맑은 공기를 많이 들이마셨다. <BR>●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냉온욕을 했다. 찬물과 더운물에 번갈아 들어가는 목욕인데 냉온욕을 하면서부터 피부가 보들보들 윤기가 나고 잠도 술술 잘왔다. </P>
<P>&nbsp;</P>
<P>“이런 생활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하자니 꾀도 나고 싫증도 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큰 힘이 되어 주었어요. 제가 하는 방법을 같이 하면서 힘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BR>변일남 씨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 정정순 씨(70세)가 한마디 거든다. <BR>“나도 그 덕에 20년 동안 앓았던 천식도 많이 나았잖어유. 봄가을이면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지난 가을, 올 봄에는 병원 한 번 안 갔으니께.” </P>
<P><BR>그래도 변일남 씨는 짐작한다. 많이 힘들었을 아내의 고통을. 그러나 그 고통을 참아낸 보람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이 악물고 실천했을 때 그의 몸에는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소변보는 횟수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피곤하던 몸도 개운하고 가뿐해졌다. </P>
<P><BR>살맛이 났다. 희망도 갖게 됐다. 이때부터는 오곡가루 대신 현미잡곡밥을 먹기 시작했고, 하루 시작을 웃음으로 열었다. 웃기 지침서를 보면서 박장대소하며 집이 떠나갈 듯 하하하~ 호호호~ 웃었다. 웃고 있는 손녀딸 사진을 안방에 붙여놓고 그 사진을 보면서 또 웃었다. <BR>그런 덕분이었을까? 이런 생활을 한 지 8개월 정도 지났을 때 변일남 씨는 기적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P>
<P>“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P>
<P><BR>전립샘암 진단을 받고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자연요법도 하고 단식도 하고…. 참으로 숨가쁘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BR>비록 낯선 삶의 방식에 때로는 힘이 들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위안은 컸다. 소변보는 횟수가 줄어든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기쁜 변화였다. 좋아지고 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P>
<P><BR>“그래도 문득문득 드는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혹시 병원 치료를 안 해서 더 나빠진 건 아닐까? 수술이 싫다면 항암치료라도 받으라고 하던 의사의 말이 자꾸만 걸렸으니까요. 그래서 검사를 한 번 받아보자 결심했어요.” <BR>검사해서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면 수술까지 할 각오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2010년 3월 변일남 씨는 또다시 피를 뽑고 조직검사를 하고, 초음파검사를 했다. </P>
<P><BR>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왔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 기적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검사 결과를 든 의사가 말했다. “암세포가 없습니다.” <BR>‘혹시 잘못 들었나?’ 생각한 변일남 씨가 물었다. “예? 다시 말씀해주세요.”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그도 놀라고 온 가족도 놀랐다. </P>
<P><BR><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2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7/03/127813464112.jpg" width=300>그러자 의사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암세포가 없다는 게 아니라 없을 수도 있고 너무 작아서 안 나타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BR>그러면서 6개월 뒤에 다시 한 번 검사해보자고 했다. 암이 없어진 것이다. 전립샘 4곳에서 발견되었던 암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P>
<P><BR>결코 믿기지 않는 일, 그래도 너무나 좋은 일… 변일남 씨는 “기적은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제게도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BR>더군다나 십수 년을 먹어온 혈압약을 끊게 된 것은 다시없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암 검진을 받으면서 같이 해본 건강검진 결과 그동안 고질병처럼 앓고 있었던 고혈압도, 고지혈증도, 동맥경화도 깨끗이 나아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암은 오히려 그에게 “커다란 축복이 됐다.”고 말한다.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763</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7-03 13:13:50</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꾸준한 관리만이 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간경화 이겨낸 권정기 씨 체험담</title>
			<description><![CDATA[<DIV>간염에서 간경화, 그리고 간암…. 간염이 두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간경화, 간암으로 진행되면서 목숨을 앗아가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러한 진행을 차단하는 것이다. 만약 그 방법이 궁금하다면 권정기 씨(38세)의 사연에 관심을 가져보자. </DIV>
<DIV>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B형 간염과의 끈질긴 악연. 설상가상 간경화로 진행되면서 삶의 고비고비에서 참으로 힘든 세월을 살아낸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오늘은 웃는다. 누구보다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노하우는 과연 뭐였을까? &nbsp;&nbsp;</DIV>
<DIV><FONT class=Apple-style-span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DIV>
<DIV><BR></DIV>
<DIV><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0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6/03/127549552183.jpg" width=250>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헌혈을 했는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B형 간염 보유자로 나왔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가족력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B형 간염 보유자였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별다른 증상도 없었고, 그런 병이 있나보다 했다.&nbsp;</DIV>
<DIV>&nbsp;</DIV>
<DIV>그러나 고 3이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대학 입시 관문을 뚫기 위해 새벽 2~3시까지 무리를 해가며 공부를 했다. 그런 때문이었을까?&nbsp;</DIV>
<DIV>대학 합격은 했지만 권정기 씨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간수치가 1000단위까지 올라가는 극도의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nbsp;</DIV>
<DIV>&nbsp;</DIV>
<DIV>걱정이 됐다. 그래도 버텼다.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이를 악물고 학교 수업을 받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그해 5월 눈물을 머금고 휴학계를 냈다. 병원에 가 봐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DIV>
<DIV>“무조건 쉬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처방해준 것이 소화제였어요. 간염이 있으면 간세포가 많이 파괴되면서 간이 붓습니다. 그렇게 되면 위장을 압박하게 되면서 소화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주로 소화제를 처방해주죠.”&nbsp;</DIV>
<DIV>&nbsp;</DIV>
<DIV>소화제 처방을 받고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 포항으로 내려간 권정기 씨.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소화가 안 되니 잘 먹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 더럭 겁이 났다. ‘이러다 간세포가 모두 파괴되어 죽는 건 아닌가?’ 하는 극도의 불안감도 엄습했다. 무엇보다 한창 나이에 간염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은 그를 더욱 옥죄었다. &nbsp;</DIV>
<DIV>&nbsp;</DIV>
<DIV>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간에 좋다는 민간요법, 좋다는 한약을 다 써 봐도 별 차도를 보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네분이 권해준 것이 있었다.&nbsp;</DIV>
<DIV>“녹즙이었어요. 자기 딸이 녹즙을 갈아먹고 죽을병에서 되살아났다며 한 번 먹어보라고 그러더군요.”&nbsp;</DIV>
<DIV>&nbsp;</DIV>
<DIV>귀가 솔깃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우선 녹즙기부터 샀다. 그리고 녹즙 재료를 구했다. 신선초, 케일, 돌나물, 민들레, 비트, 쑥으로 녹즙을 갈아서 먹기 시작했다. 하루 세 번 식전에 꼭꼭 마셨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권정기 씨는 깜짝 놀랐다.&nbsp;</DIV>
<DIV>&nbsp;</DIV>
<DIV>“이상하게 몸이 가뿐해지면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으니까요. 정말 믿을 수 없었어요.”&nbsp;</DIV>
<DIV>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황달기로 누렇게 뜬 얼굴은 점점 제 색깔을 찾기 시작했고, 밥도 잘 먹게 되면서 몸무게도 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살맛이 났다. 그래서 더 열심히 실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세 번 신앙처럼 녹즙을 갈아 마셨다.&nbsp;</DIV>
<DIV>&nbsp;</DIV>
<DIV>그렇게 1년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다시금 건강을 회복했다. 간수치도 정상수치로 돌아왔다. 비활동성 간염 보유자로 통보를 받던 날, 그는 복학신청을 했다. 그것은 1992년,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의 일이었다.&nbsp;</DIV>
<DIV>&nbsp;</DIV>
<DIV><STRONG>복학,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시련&nbsp;</STRONG></DIV>
<DIV>건강을 되찾으면서 새롭게 시작된 대학생활. 하지만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대학 4학년 졸업반이던 시절, 신학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무리한 탓이었다. 또다시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nbsp;</DIV>
<DIV>“갑자기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오면서 오줌에 붉은 피까지 섞여 나오자 부랴부랴 병원에 갔습니다. 혈액을 채취해서 검사를 했더니 간수치가 또다시 1000단위로 치솟아 있더군요.”</DIV>
<DIV>&nbsp;</DIV>
<DIV><IMG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alt=02 align=righ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6/03/127549552239.jpg" width=260>나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신학대학원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픈 몸을 이끌고 공부를 했고, 바라던 신학대학원에 진학은 했지만 곧바로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만신창이가 된 몸.&nbsp;</DIV>
<DIV>&nbsp;</DIV>
<DIV>“그때 불현듯 떠오른 것이 녹즙이었어요. 살만해지자 &nbsp;주방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녹즙기를 꺼내서 다시금 녹즙을 짜기 시작했어요.”&nbsp;</DIV>
<DIV>녹즙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년 정도 꾸준히 실천했을 때 그의 몸은 다시금 건강해졌다.&nbsp;</DIV>
<DIV>“녹즙만 들어가면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이 회복되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뿐이었어요.”&nbsp;</DIV>
<DIV><BR></DIV>
<DIV><STRONG>간경화 진단을 받고...&nbsp;</STRONG></DIV>
<DIV>몸이 회복되자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권정기 씨.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기에 녹즙을 짜 먹을 수 없는 여건이 못내 아쉬웠지만 믿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니까 이젠 다시 간수치가 올라가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nbsp;</DIV>
<DIV>&nbsp;</DIV>
<DIV>그런 덕분이었을까? 무사히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전임전도사로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생활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종종 새벽기도회도 인도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몸은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오른쪽 옆구리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nbsp;</DIV>
<DIV>&nbsp;</DIV>
<DIV>“대개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 몸에 무리가 왔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푹 쉽니다. 그런데 며칠을 푹 쉬어도 묵직한 통증이 가시지 않는 거예요.”&nbsp;</DIV>
<DIV>은근히 걱정이 됐다. 두려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찾은 병원…. 그런데 초음파를 찍어본 의사가 이상한 말을 했다. 간경화 초기 같다는 진단을 내렸던 것이다. 초음파상 간이 거칠어져 있고, 혈소판도 적고, 비장도 비대돼 있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간염이 간경화로 진행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해 본 일이었다.&nbsp;</DIV>
<DIV>&nbsp;</DIV>
<DIV>“간경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간경화는 술을 많이 마시면 오는 증상인 줄 알았지 B형 간염으로도 간경화가 될 수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어요.”&nbsp;</DIV>
<DIV>자신의 무지를 탓해 봐도, 자신의 안일함을 탓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간경화 진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돼 있었고, 병원에서 해줄 일도 별로 없었다.&nbsp;</DIV>
<DIV>&nbsp;</DIV>
<DIV>
<TABLE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
<TBODY>
<TR>
<TD><IMG alt=03.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6/03/127549552315.jpg" width=30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권정기씨는 네이버 까페 '간사랑 커뮤니티'를 개설, 다양한 간질환의 식이요법을 제공하고 있다.</TD></TR></TBODY></TABLE>암담한 현실, 방법도 없고,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까지 예고돼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권정기 씨가 또다시 붙잡은 것이 있었다.&nbsp;</DIV>
<DIV>“녹즙이었어요. 건강이 회복되면 마음이 느슨해져서 그만두고, 그만두고 했었는데 그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교회 주방 귀퉁이에서 녹즙기를 돌렸어요. 심지어 명절날 집에도 가지 않고 교회 주방에서 녹즙기를 돌리며 녹즙을 짰습니다.”</DIV>
<DIV><BR></DIV>
<DIV><STRONG>다시금 실패는 없다!&nbsp;</STRONG></DIV>
<DIV>간경화 초기라는 진단을 받고 깜짝 놀라 다시금 시작한 녹즙. 몇 년 꾸준히 하자 오른쪽 옆구리의 묵직한 통증도 점점 없어져 갔다. 다시금 살만해졌다. 검사 결과 간도 많이 매끈해져 있다고 했다. 또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목사 안수를 받고 더 바삐 살기 시작한 지 5년 정도 지난 2008년 6월 어느 날 아침, 권정기 씨는 깜짝 놀랐다.&nbsp;</DIV>
<DIV>&nbsp;</DIV>
<DIV>입안에 흥건히 피가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잇몸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났다. 또다시 시작된 건가? 극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nbsp;</DIV>
<DIV>오른쪽 가슴에 다시금 나타난 묵직한 통증은 며칠을 쉬어도 풀리지 않았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대변색이었다. 회색변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nbsp;</DIV>
<DIV>&nbsp;</DIV>
<DIV>“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했어요. 그런데 혈소판이 9만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리 없이 간경화 증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겁니다.”&nbsp;</DIV>
<DIV>그제서야 생각났다. 바쁘다는 핑계로 녹즙을 멀리하며 지낸 5년 세월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이때부터 그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철저한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목숨 걸고 실천했던 식이요법은 다음과 같다.&nbsp;</DIV>
<DIV><BR></DIV>
<DIV><STRONG><FONT color=#ff3300>*&nbsp;하루 세 잔 녹즙 마시기&nbsp;</FONT></STRONG></DIV>
<DIV>권정기 씨는 말한다. 녹즙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치료제라고. 무엇보다 간세포의 재생에 도움이 되는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을 공급해주므로 간을 살리는 생명의 즙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하루 세 번 식사 전에 꼭꼭 녹즙 한잔씩을 마셨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신선초, 미나리, 케일, 돌나물, 비트, 쑥 등으로 즙을 짜서 한 번에 250~300cc 정도를 마셨다고 한다.&nbsp;</DIV>
<DIV>&nbsp;</DIV>
<DIV><STRONG><FONT color=#ff3300>*&nbsp;하루 두 번 콩즙 마시기</FONT></STRONG></DIV>
<DIV>식물성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하루 두 번 콩즙 마시기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콩즙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믹서기에 삶은 콩과 저지방우유를 넣은 후 갈아서 하루 두 번 식간에 마셨다고 한다.&nbsp;</DIV>
<DIV>&nbsp;</DIV>
<DIV><STRONG><FONT color=#ff3300>*&nbsp;현미잡곡밥 먹기&nbsp;</FONT></STRONG></DIV>
<DIV>흰밥 대신 현미와 콩에 각종 잡곡을 섞어서 만든 잡곡밥을 하루 세 끼 먹었다.&nbsp;</DIV>
<DIV>&nbsp;</DIV>
<DIV><STRONG><FONT color=#ff3300>*&nbsp;달인 물 수시로 먹기&nbsp;</FONT></STRONG></DIV>
<DIV>간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가시오가피, 구기자, 오미자, 대추, 운지버섯, 황기를 넣고 달여서 물이 먹고 싶을 때 물 대신 꾸준히 마셨다고 한다.&nbsp;</DIV>
<DIV>&nbsp;</DIV>
<DIV>그 덕분이었을까? 철저한 식이요법을 시작하고 15일이 지나자 회색변이 누런색으로 바뀌었다. 몸 상태도 서서히 호전되면서 가벼워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실천했다. 교회에 갈 때도 녹즙과 콩즙을 짜고 갈아서 냉온병에 담아 갔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음팩으로 싸서 갈 만큼 온정성을 다했다. 그렇게 3개월 정도가 지났다.&nbsp;</DIV>
<DIV>&nbsp;</DIV>
<DIV>“제법 몸이 살만해지자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초음파상 간경화 소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nbsp;</DIV>
<DIV>혈액검사는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혈소판도 15만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잇몸에 피도 안 나고, B형 간염은 비활동성이라는 진단도 받았다.&nbsp;</DIV>
<DIV>&nbsp;</DIV>
<DIV>그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기쁜 건 수년간 그를 괴롭혔던 꽉 누르는 듯한 오른쪽 옆구리 통증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는 점이었다.&nbsp;</DIV>
<DIV>그 이후로 한 번도 기분 나쁜 압박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권정기 씨. 그는 믿고 있다. 그것은 분명 지금껏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천하고 있는 철저한 식이요법 덕분이라고. 그래서 오늘도 더 열심히, 더 정성껏 녹즙을 마시고, 콩즙을 먹고, 달인 물도 마시며 현미잡곡밥을 먹는다.&nbsp;</DIV>
<DIV>&nbsp;</DIV>
<DIV>그러면서 그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간질환에 대한 공부다. 책도 읽고 논문도 보면서 다양한 간질환 정보를 습득하는 데 열심이다. 특히 이 정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간사랑커뮤니티’라는 네이버 카페도 개설, 간질환 식이요법과 최신 간질환 정보를 올리고 있다.&nbsp;</DIV>
<DIV>개설한 지 1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회원수가 1900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어 기쁘다는 권정기 씨.&nbsp;</DIV>
<DIV>&nbsp;</DIV>
<DIV>그는 말한다. 간염은 절대 완치는 없고 극복만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오늘도 해이해지는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 무질서해지려는 생활에도 제동을 건다. 꾸준한 관리만이 간염을 극복하는 지름길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nbsp;</DIV>]]></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749</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6-03 00:43:38</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지긋지긋~ 천식 이겨낸 정미경 씨 체험담 “물 먹고 소금 먹고 풀 먹어서 얼마든지 병이 낫게 할 수 있어요”</title>
			<description><![CDATA[<P>스물여덟 살 때였다. 시작은 감기였다. 처음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감기쯤이야?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어서 감기약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임신 7개월의 몸. 버텼다. 밤새도록 기침을 해댔지만 이 악물고 3개월을 버텨냈다. 그리하여 비로소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 기쁨은 실로 컸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계속된 기침 감기는 한 사람의 인생 지침을 돌려놓았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날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비도 수차례. 감기에서 시작된 기관지천식으로 20여 년 동안 참으로 모진 삶을 살아온 정미경 씨(64세)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본다.&nbsp; </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P>
<P><BR><STRONG>단순한 감기가 아니었다! </STRONG><BR>아이를 낳으면 나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감기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숨이&nbsp; 막히면서 자지러질듯 기침을 해대는 날이 잦아졌다. <BR>“안 되겠다 싶어 전주에 있는 제일 큰 병원을 찾아갔어요. 진찰을 마친 의사는 ‘아무 병도 아니다. 신경성이다’라면서 약을 지어줬고 그 약만 받아서 병원을 나왔어요.” </P>
<P><BR><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0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5/06/127313696592.jpg" width=290>신경성 약이어서 그런지 약만 먹으면 잠이 쏟아졌다. 갓 태어난 아이가 젖 달라며 칭얼대는 소리도 듣지 못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지만 기침은 여전했다. 숨쉬기가 힘들면 약을 먹고 하루종일 잠을 잤다. <BR>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또 임신을 했던 것이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축복으로 여겼다. 그런 와중에도 기침 감기는 여전했다. 아니 날로 그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다. 임신 5개월 정도 됐을 때는 누워서 잠조차 자지 못할 정도로 증세가 심해졌다. 온밤을 앉아서 꼬박 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참다못한 어느 날 처음 갔던 병원을 다시 찾았다. </P>
<P><BR>“1년 만에 갔더니 담당의사가 바뀌어 있었어요. 그런데 의사는 아무런 검사도 없이 제 숨소리만 들어보더니 ‘기관지천식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BR>단순한 감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병을 키웠느냐?”는 의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nbsp; 하지 못한 채 병원문을 나섰던 정미경 씨. 그녀는 결코 알지 못했다. 신경성이라는 말만 믿고 방치한 1년 세월이 그녀 삶에 어떤 후환을 남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P>
<P>&nbsp;</P>
<P><STRONG>지긋지긋 천식은 생명을 위협하고 </STRONG><BR>감기인줄 알았던 증상이 기관지천식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참으로 힘든 생활이 이어졌다. 임신 중이라 약도 함부로 먹을 수 없는 상태여서 고통의 무게는 더 컸다. <BR>“심한 기침으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병원에 입원을 해서 주사를 맞았어요. 그런데 그 주기가 점점 빈번해지면서 천식 증상도 날로 심해져갔어요. 임신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아예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워야 했으니까요.” </P>
<P><BR>누울 수조차 없었다. 한 번 기침 발작이 일어나면 ‘혹시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에 아이와 같이 있어도 안 되었다. 산소가 부족하면 곧바로 기침 발작이 일어났다. 슬픈 생각도 금물이었다. 슬픈 생각을 하면 천식 발작이 일어나면서 숨이 콱콱 막혔다. 크게 웃지도 못했다. 기침 발작이 일어나면서 어김없이 병원에 실려 가야 했다. </P>
<P><BR>밤이든 낮이든 오로지 혼자서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하룻밤에 쓰레기통 한 가득 가래를 뱉어내야 했고, 아침이 되면 얼굴은 퉁퉁 부어있기 일쑤였다. <BR>이런 그녀는 병원에서도 기피대상 환자였다. 개인병원에 가면 큰 병원에 가라고 등 떠밀기 일쑤였고, 막상 큰 병원에 가도 마땅한 치료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심한 천식 발작이 일어나면 아쉬운 대로 기침을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그 고통을 끝내줄 묘약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출산일이 다가오면서 ‘과연 정상적으로 분만을 할 수 있을까?’였다. 의사도, 가족도 모두 걱정했다. </P>
<P><BR>그런데 출산 예정일이 15일 정도 남아 있던 어느 날 밤 진통이 시작됐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차는 끊기고 도저히 병원에 갈 상황도 아니었다. <BR>“시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어쩌겠어요? 아이를 낳을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삼신할미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답니다.” <BR>모두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천식 발작없이 너무도 가뿐하게 건강한 아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P>
<P>&nbsp;</P>
<P><STRONG>천식 약 찾아 세상을 뒤지다 </STRONG><BR>천식 발작 없이 기적처럼 아이를 낳았을 때 정미경 씨는 ‘혹시?’ 하는 기대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다음날 저녁부터 더 심한 천식 발작이 일어나자 결심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 뒤져서라도 천식약을 찾아내리라! </P>
<P><BR>“전국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건 병은 한 가지인데 약은 수백 가지라는 거였어요. 한침이라고 해서 큰 침이 있었는데 이 침을 맞으면 천식이 낫는다고 해서 맞아보기도 하고, 수지침을 100일 맞으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해봤어요. 심지어 피부 이식수술을 해서 체질을 바꿔주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피부 이식수술까지 했지만 모두가 허사였어요.” </P>
<P><BR>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천식 발작은 꿈쩍도 안 했다. 여전히 앉아서 하얀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나이 사십 줄에 들어서고 있었고, 어렵게 얻은 막내 아들도 10살이 되었다. <BR>“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천식 발작이 일어날까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앉아 있는데 막내 아들이 방문을 열더니 ‘엄마 돈 100원만’하고 조르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해요.” </P>
<P><BR>그런 아들을 향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절래절래 흔드는 그녀를 향해 ‘택시 타고 만날 병원가면서 돈 100원도 없대!’하면서 토라지는 아들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졌다고 말한다. </P>
<P>&nbsp;</P>
<P><STRONG>그래도 삶에 대한 미련은 남아 </STRONG><BR><IMG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alt=02 align=righ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5/06/127313696609.jpg" width=290>온갖 좋다는 방법을 다해 보아도 천식 발작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병원에 가면 그녀의 거친 숨소리만 듣고도 돌려세우기 일쑤였다. <BR>“생각다 못한 남편이 하루는 ‘나는 당신을 꼭 살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군산에서는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으니 서울에 있는 최고의 병원으로 가보자.’고 하더군요.” </P>
<P><BR>그래서 나선 길, 서울에 가면 획기적인 치료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상경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BR>“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진찰을 마친 의사는 조용히 남편을 불러 ‘부인의 병은 절대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젊은 사람이 하도 딱해 병실은 잡았지만 며칠 있다가 집에 데려가서 헤어질 연습을 하라’고 했다더군요.” </P>
<P><BR>이 말에 충격을 받은 남편은 회사 일을 핑계로 집으로 내려가고 입원실이 없어 특실에 입원을 한 정미경 씨는 곧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도 그녀에게 해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존의 치료법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과 주사, 그리고 주사를 놓아도 기침이 잦아들지 않으면 산소호흡기를 부착해줄 뿐이었다.</P>
<P><BR>“그러자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제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볼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전까지는 이렇게 아파도 제가 꼭 살아 있어야 가정이 유지되는 줄 알았어요. 남편의 월급 50%를 제가 써도 살아 있어야 된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염치가 없었어요. 막말로 건강한 새엄마가 들어오면 훌륭히 제 자리를 메워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편도 아이들도 얼마든지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P>
<P><BR>그런데 어렵게 낳은 막내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도 과자 사먹게 100원 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였다. 그 애가 스무 살만 되었어도 아무런 미련 없이 간단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식 발작이 일어날 때 산소호흡기를 부착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P>
<P><BR>“하지만 끝내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그리고 기도를 했어요. 절박한 심정으로 신을 찾았어요. 40평생을 살아오면서 늘 아프기만 했지 뭣 하나 해놓은 것 없이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무작정 매달렸어요.” <BR>신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미경 씨는 신을 믿었다. 기회를 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 믿음 하나에 매달려 퇴원수속을 밟고 15일치 약만 지어 집으로 내려왔다.<BR>&nbsp;<BR><STRONG>의외의 곳에서 희망을 만나다</STRONG><BR>정말로 신의 도움이 있었던 걸까? 누가 봐도 가망 없어 보였던 정미경 씨는 천식 발작으로&nbsp;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그렇게 4년이 흐른 어느 날, 성당에서 만난 교우가 그녀에게 권한 것이 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말은 “물 먹고, 소금 먹고, 풀 먹어서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BR></P>
<P>“처음에는 안 믿었어요. 그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온갖 용하다는 방법을 다 써봤지만 허사였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치는 의사도 못 고친 걸 어떻게 물 먹고, 소금 먹고 풀을 먹어서 고칠 수 있겠어요?” <BR>그래서 흘려들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되고, 아이들과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게 되면서 그녀의 생각은 변했다. </P>
<P><BR>“아이들한테 엄마의 아픈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물 먹고 소금 먹고 풀 먹어서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일러준다는 건강프로그램에 참가했어요. 가장 먼저 5일 단식부터 시키더군요.” <BR>물과 죽염, 그리고 마그밀을 주었다. 그렇게 생전 처음 단식이라는 걸 했다. 엄청난 양의 변이 나왔다. 숙변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밤에도 늘 앉아서 잠을 자야 했던 정미경 씨였다. 그런데 단식을 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누워서 잠을 잘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살 것 같았다. 희망도 생겼다. </P>
<P><BR>그런 그녀의 귀에 “우리 몸에 쌓여 있는 숙변만 빠지면 그 어떤 병도 다 나을 수 있다.”는 말이 들렸다. <BR>‘그래서인가?’아무래도 좋았다.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래서 5일 단식이 끝났을 때 우겨서 5일 더 단식을 감행했다. 그렇게 10일 단식이 끝났을 때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P>
<P><BR>“교육장 갈 때만 해도 숨이 차서 세 마디 이상은 하지 못했는데 10일 단식이 끝나고 나서는 오래오래 말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10일 후에 집에 돌아오니 남편 왈, ‘당신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하더군요.” <BR>이때부터 정미경 씨의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생채식을 시작했고, 자연요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새 삶을 선물해줬다. </P>
<P>&nbsp;</P>
<P><STRONG>덤으로 사는 인생 24년 </STRONG><BR>비로소 삶에 새희망을 품게 됐다는 정미경 씨. 10일 단식과 10일 회복식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조금 색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먹을거리를 완전히 바꾸었다. <BR>● 생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곡 곡식 생것을 빻아서 밥숟가락으로 두 수저를 한 끼 식사 대용으로 먹었다. <BR>● 생채식도 시작했다. 중간 접시 하나 정도로 야채식을 실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채는 뿌리채소 2가지, 잎채소 3가지로 해서 5가지 이상을 생채식으로 먹었다고 한다. <BR>● 또 있다. 아침은 안 먹고 하루 두 끼식을 하되, 저녁은 최대한 적게 먹었다고 한다. 돈 안 들고, 하기도 쉬운 자연요법도 생활 속으로 끌어들였다. <BR>● 오전에 3번, 오후에 3번 풍욕을 꼭꼭 실천했다. <BR>● 냉온욕을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했다. <BR>● 하루에 한 시간씩 시간 내어 동네 뒷산에도 올랐다. <BR>● 산책 후에는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는 각탕을 20분간 꼭꼭 했다. </P>
<P><BR>그렇게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정미경 씨의 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하루에 천식 약을 두 번만 먹어도 괜찮아졌다는 것이었다. <BR>“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5개월 정도 됐을 때는 하루에 한 번만 먹어도 되더니 8개월 정도 지났을 때는 아예 약을 안 먹어도 될 정도가 됐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에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P>
<P><BR>비로소 지긋지긋한 천식약과 이별을 고한 정미경 씨. 그것은 그녀 나이 44세 때의 일이었다. 살맛이 났다. 설사 감기에 걸렸다 해도 머리만 아플 뿐이지 천식과는 무관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내 몸을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암이나 고혈압, 당뇨 등 모두다 병명만 다를 뿐이지 내 몸에서 일어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한 가지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됐던 것이다. </P>
<P><BR>“그것은 다름 아닌 좋은 물을 마시고, 음식을 적절히 먹고, 좋은 소금을 먹으면 된다는 깨달음이었어요.” <BR>이 깨달음은 그녀 인생에 커다란 과제 하나를 안겨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었다. <BR>“그래서 군산에 황토집을 짓고 단식과 생채식을 지도하는 생활관을 열었어요. 이 일은 남은&nbsp; 여생에 제가 꼭 해야 될 일로 여겼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P>
<P><BR>그런 탓에 정미경 씨는 오늘도 단식과 생채식을 지도하는 일로 하루해를 보낸다. 어느덧 20여 년째다. 무엇보다 그녀는 올바른 음식을 먹어야 우리 몸이 건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탓에 그 방법을 알려주는 일에도 열심이다. </P>
<P><BR>실제로 정미경 씨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전통음식 만들기, 아이들 간식 만들어 먹이기, 텃밭 가꾸기 등 실질적으로 건강식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그녀가 당부하는 말은 한 가지다. 현명한 주부가 되라는 것이다. 가족을 건강하게 하고, 나라를 건강하게 하는 주춧돌은 주부의 손끝에서 나오기 때문이란다.&nbsp; </P>
<P>&nbsp;</P>
<P><FONT color=#009999>* 현재 정미경 씨는 군산에 황토집을 짓고 단식과 생채식 실천요령을 알려주고 있다. 별미 김치 담그는 법, 간장, 된장 담그는 법도 배울 수 있으므로 참고하자(☎ 063-452-6313). </FONT></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740</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5-06 17:58:16</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식도암 4기 이겨낸 김경식 씨 희망가 “치료하면 6개월, 치료 안 하면 2개월 선고 거뜬히 이겨냈어요”</title>
			<description><![CDATA[<P>“치료하면 6개월, 치료 안 하면 2개월!”<BR>어느 날 느닷없이 이런 선고를 받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 심정을 표현할 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서울 북가좌동에 사는 김경식 씨(60세)는 그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아낸 사람이다. 너무 늦게 발견한 암세포. 의사는 말했다. 수술은 할 수 없다고. 그 대신 항암요법을 써서 암세포부터 줄이자고 했다. 하지만 두 번의 항암요법에도 암세포는 꿈쩍도 안 했다. 더 이상 손써볼 방법이 없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김경식 씨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살아있다. 누구보다 건강하다. 비결이 뭐였을까?&nbsp; </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P>
<P><BR><STRONG>
<TABLE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
<TBODY>
<TR>
<TD><IMG alt=1.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4/03/1270260814.jpg" width=30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무청을 다듬고 있는 김경식 씨</TD></TR></TBODY></TABLE>젊었을 때부터 위장병 </STRONG><BR>한평생을 사는 동안 건강한 것만큼 큰 축복은 없다고 말문을 여는 김경식 씨. <BR>그것은 그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주인공이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건강은 그의 걱정거리였다. 시작은 위장병이었다. 스물한 살 때 크게 한 번 체한 후부터 위장병은 그의 고질병이 되었다. 늘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P>
<P><BR>병원에서는 위궤양이라며 수술을 권했지만 선뜻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증상이 심하면 그때그때 약으로 다스렸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근 20년을 넘고 있었다. <BR>“그래도 이 정도쯤이야 하며 잘 살았어요. 누구나 고질병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잖아요.” <BR>그런 그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사업을 해보겠다며 나서면서부터였다. <BR></P>
<P>젊었을 때부터 해오던 이발사 일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런데 하는 사업마다 줄줄이 망하면서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내몰렸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나날들. 그 속에서 김경식 씨가 감당해야 할 시련의 무게는 버거웠다. 가진 돈은 바닥을 드러내고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BR>이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을 때 그의 몸에는 불행의 씨앗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 전조는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거북한 증상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P>
<P>&nbsp;</P>
<P><STRONG>목에 걸린 것은 생선 가시가 아니었다! </STRONG><BR>2003년 3월 어느 날, 이상했다. 생선을 먹은 것도 아닌데 자꾸만 목이 거북했다. 꼭 생선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김치 잎으로 쌈을 싸서 먹어보았다. 생선 가시가 걸렸을 때 쌈을 싸먹으면 내려간다는 어른들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P>
<P><BR>“한 달 정도 그렇게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도 어떡해요? 하루하루 살기가 빠듯하다보니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그냥저냥 살았어요.” <BR>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음식물 넘기기가 힘들어졌다. 밥을 넘기는 일조차 고통스럽자 가까운 이비인후과에 갔다. 위내시경 검사를 했지만 목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P>
<P><BR>‘괜한 걱정이었나?’ 검사 결과를 위안으로 삼으며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한 해가 훌쩍 지나 2004년 1월 어느 날, 그날은 김경식 씨가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위내시경 검사 날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고질병으로 앓아오던 위장병 때문에 매년 신년 초에는 꼭꼭 위 내시경 검사를 해오고 있던 터였다.&nbsp; </P>
<P><BR>“늘 다니던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했어요. 그런데 담당 의사가 식도에 악성 종양이 보인다면서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게 아니겠어요. 악성 종양이 뭐냐고 제가 물었어요. 사실 악성 종양이라는 말은 그때 처음 듣는 말이었고,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러자 담당 의사 선생님은 ‘그냥 안 좋은 병’이라고 하면서 꼭 큰 병원에 가라는 말만 했어요.” </P>
<P><BR>속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렀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됐다. 악성종양이 암이라는 것을. 아찔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대면서 빚도 많이 지고 있는 상태에서 암까지 걸리다니…. <BR>가족들한테는 차마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런 그에게 술은 더없이 좋은 친구였다. 모든 걸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늘 술에 취해 있으면서 서서히 삶에 대한 미련도 털어내기 시작했다. </P>
<P><BR>“그냥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빠듯한 살림에 치료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으니까요. 그런데 2개월 쯤 지났을 때 아내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세브란스병원에 부랴부랴 입원을 했습니다.” <BR>각종 검사가 이어졌고,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왔다. 담당의사는 그동안 찍은 수십 장의 사진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P>
<P>“병명은 식도암 4기. 이미 림프절까지 전이가 돼서 수술은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더군요. 다만 항암치료를 2번 정도 해서 암의 크기가 줄어들면 그때 가서 레이저 치료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P>
<P><BR><STRONG>항암치료는 고통스러워! </STRONG><BR>너무 늦게 발견돼 하루가 다급했던 김경식 씨. 곧바로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치료였다. 1차 시행 후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고 일주일이 채 안 돼 머리카락은 물론 손발톱까지 다 빠져버렸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음식을 제대로 넘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밥을 갈아서 물처럼 만든 것도 한 모금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13일 만에 응급실에 실려 가야만 했다. </P>
<P><BR>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고 그런 상태로 2차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또다시 시작된 고통.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렇게 두 번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던 날. 참담했다. 두 번의 독한 항암치료에도 암세포는 꿈쩍도 안했던 것이다. </P>
<P><BR>“담당의사가 아내에게 하는 말이 열린 문틈 사이로 들리더군요. 얼마 못 살 것 같다고. 독한 약을 투여해도 암이 꿈쩍도 안 한다면서 다른 방법을 해야겠는데 좀 위험할 수 있으니 가족들과 상의하라고.” <BR>그 말을 듣는 순간&nbsp;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참고 참았던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곧바로 병원에 있는 기도실로 달려갔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3년만 살게 해달라고. 자식들 결혼하는 것만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제 몸을 맡길 테니 제발 살려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어요.” </P>
<P><BR>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도실을 나온 그는 그 길로 샤워실로 갔다. 그리고 방사선 치료를 하기 위해 몸에 그려놓은 표시들을 하나하나 지우기 시작했다. 또다시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몸이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BR>의사도 가족도 모두 말렸지만 퇴원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면 죽는다는 경고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치료 받으면 6개월, 치료 안 받으면 2개월”이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묵묵히 퇴원 수속을 밟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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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63 align=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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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IMG alt=2.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4/03/12702608141.jpg" width=263></TD></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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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김경식 씨에게 산은 건강을 되찾게 해준 친구다.</TD></TR></TBODY></TABLE>죽을 운명은 아니었다 </STRONG><BR>부득부득 우겨 퇴원을 했지만 날로 심해지는 통증 앞에서 김경식 씨의 하루하루는 고통으로 얼룩졌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벽에 부딪치며, 온 집안을 뒹굴며 통증을 이겨보려 애썼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 그러자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단어가 떠올랐다. 자살이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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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것은 너무나 강렬한 유혹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집에서 내려다본 4월의 한강. 봄빛 머금은 한강은 푸르렀다.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놓고 한강으로 갔다. 지긋지긋한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P>
<P>“그러나 죽을 운명은 아니었나 봐요. 지나가던 사람에게 구출되면서 생각을 고쳐먹는 계기가 됐어요.” 살 길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살 길도 분명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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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야채스프 건강법은 구세주 </STRONG><BR>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김경식 씨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렇다면 살길을 한 번 찾아보자’고&nbsp; 결심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암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는 일이었다. <BR>“암을 이긴 사람이나 암 시민연대 같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암을 이길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암이라는 병은 한 가지인데 약은 수십 가지더군요. 더군다나 암에 좋다고 알려진 것은 모두 부르는 게 값이어서 제게는 그림의 떡이었어요.” </P>
<P><BR>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야채스프였다. 무엇보다 돈이 들지 않는 방법이어서 관심이 갔다. <BR>“무와 무잎, 당근 등으로 스프를 끓여 먹으면 되는 방법이었는데 말기암이 나은 사람도 있고 백혈병도 나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반신반의하면 저도 한 번 먹어보기로 결심했어요.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보다 뭔가 해보자 생각했어요.” </P>
<P><BR>하는 방법도 쉬웠다. 생무 250g+생당근 120g+생우엉 60g+표고버섯 한 장+말린 무잎 4~5장에 물을 붓고 푹 고아 그 즙을 하루 세 번 마시면 되는 것이었다. <BR>“아침 공복에 한 잔, 아침과 점심 중간에 한 잔, 점심과 저녁 중간에 한 잔으로 해서 하루 세 잔을 마셨어요. 그것을 만드느라 아내가 고생 많았어요. 꼭두새벽부터 동동거려야 했으니까요.” </P>
<P><BR>특히 김경식 씨는 농촌진흥청에 가서 무를 재배하는 기술 교육도 받았다고 한다. 이를 밑천으로 주말농장도 만들어 유기농 무재배도 시작할 만큼 그의 정성은 지극했다. <BR>그럴 즈음 우연히 듣게 된 이상구 박사의 강연은 신의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 <BR>암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줬기 때문이었다. </P>
<P><BR>이때부터 김경식 씨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생활습관도 달라졌고, 식습관도 180도 바뀌었다. 매사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분명 전에 없던 감정이었다. 먹을거리에서 인공적인 것, 가공적인 것을 모두 치워버린 것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점이었다. 생전 하지 않았던 운동도 새로이 시작했다. 집 뒷산을 수시로 오르내렸다. </P>
<P><BR>그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생활한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도 힘들게 했던 암의 통증, 그 통증이 슬그머니 사라졌던 것이다. 살맛이 낫다. 그래서 더 열심히 실천했다. 하루 세 번 꼭꼭 야채스프를 먹었고 생활은 절도 있게, 음식은 현미잡곡에 자연식을, 운동은 꾸준히, 그리고 매사 감사하며 웃고 살고 하루하루 즐겁게 보냈다. 좋은 생각, 좋은 말만 하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훌쩍 떠나 그곳에서 며칠씩 머무르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았다.</P>
<P><BR>“그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났어요. 암의 통증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9개월 정도 지났을 때는 정상인처럼 밥도 넘길 수 있게 됐으니까요.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젊었을 때부터 고질병처럼 앓았던 위장병도, 변비도, 비염 증상도 말끔히 없어져버렸다는 점이었어요.”그렇다면 암세포는 어떻게 됐을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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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암세포가 사라졌다! </STRONG><BR>“치료 안 하면 2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은 이미 틀린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종종 궁금했어요. 암세포는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병원에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김경식 씨다. 그러나 이런 그의 결심도 아구찜을 먹다가 살코기가 목에 걸리는 바람에 꺾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운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라고 해서 다시금 암 검진을 받았던 병원에 가게 되었어요.” </P>
<P><BR>4년 만에 다시 찾은 병원. CT·PET·내시경 검사를 마친 의사가 말했다. “암세포가 있습니다.” <BR>통증도 없는데…. 밥도 먹을 수 있게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세포는 건재했단 말인가? <BR>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곧이어 들려온 의사의 말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P>
<P><BR>“의사의 말이 식도암 4기 진행성 암 환자가 4년 만에 이렇게 살아서 오지 못했고, 설사 살아서 왔다 하더라도 위나 폐, 간이나 뼈로 전이돼 있는 상태가 대부분인데 그대로 있는 암은 처음 본다면서 놀라워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몸이 건강하니 이번 기회에 항암치료를 다시 하자고 하더군요. 식도암은 막무가내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면서.” </P>
<P>많이 망설였지만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35회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했고, 그 결과에 의사도, 그도 만족했다. 그의 몸에서 암세포가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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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항암 생활은 현재 진행형! </STRONG><BR>2008년 암세포가 없어졌다는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김경식 씨는 알고 있다. 암의 완치는 없다는 걸. 언제, 어느 곳에서든 불쑥 그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게 암이라는 걸. 그래서 오늘도 그의 생활은 여전히 절도 있고, 규칙적이다. </P>
<P><BR>“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여전히 야채스프를 먹고,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갑니다. 그런 다음 으쓱한 곳에 가서 옷을 벗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외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경식이는 건강합니다. 경식이는 행복합니다. 경식이는 부자입니다. 경식이는 성공했습니다. 경식이는 할 수 있습니다.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코가 있고 먹을 수 있는 입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가 있기에 경식이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목청껏 소리칩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어요.” </P>
<P><BR>세포 하나하나를 쓰다듬으면서 직접 지은 노래도 부른다고 한다. 직접 지었다며 들려주는 가사가 재미있다. “즐겁게 웃으면서 하하하 사랑하고 감사하고 용서하고 칭찬했더니 경식이 몸에서, 환우들 몸에서 암세포가 사라져버렸네. 떠나가 버렸네. 우리 모두 감사하며 봉사하며 건강하게 살아보세.” </P>
<P><BR>혼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행복하다는 김경식 씨. <BR>비록 6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인 체크를 하고 있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늘 웃고 살고 노래 부르며 살고 때로는 산 좋고 물 좋은 곳도 찾아다니며 맺힌 것 없이 산다면 암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725</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4-03 11:14:54</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직장암 이겨낸 박금순 씨 희망가  “하하 호호…눈만 뜨면 꼭 15초만 웃으세요”</title>
			<description><![CDATA[<P>탤런트 뺨치는 외모다. 옷차림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얼굴에선 하하~호호~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지난 삶은 결코 녹록찮다. 시쳇말로 소설 몇 권 분량이다.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지난 삶, 설상가상 직장암까지….&nbsp; </P>
<P>&nbsp;</P>
<P>그래도 오늘은 웃고 사는 여자 박금순 씨(57세). 눈만 뜨면 하하~ 호호~ 15초를 웃으라고 말하는 그녀는 웃음강사다. 웃는 틈틈이 늴리리야~ 늴리리야~ 장단에 맞춰 민요도 부른다.&nbsp; 문득문득 찾아드는 암에 대한 두려움을 웃음과 민요로 말끔히 걷어냈다고 말하는 그녀의 항암생활을 살짝 엿보자. <BR><SPAN style="COLOR: rgb(0,153,255)">글 | 이은혜 기자</SPAN><BR></P>
<P><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3/03/126761537775.jpg" width=300><STRONG>돈, 전부가 되다</STRONG></P>
<P>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자식 낳아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것. 아마도 모든 여성들의 한결같은 소망일 것이다. 박금순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의 여자들처럼 남편 사랑으로 행복한 여자이고 싶었다. <BR>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7년의 결혼생활은 지금도 악몽으로 남아있다. 그 기막힌 사연이야 구구절절 말로 다할 수 없지만 맨몸으로 집을 나오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P>
<P><BR>수중에 돈 한 푼 쥐지 않은 젊은 여자…. 그런 여자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장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것조차 버거웠다. 비로소 돈의 무서움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돈은 그녀의 신앙이 되었다. 혼자된 몸으로 기댈 곳은 돈밖에 없다고 믿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아까워 두 끼만 먹었다. 밥은 그저 허기를 메우면 되는 거였다. 닭이 먹고 싶을 때는 닭발로 대신하고 토큰 하나 아끼려고 다섯 정거장 걷기는 예사였다. </P>
<P><BR>안 해본 일도 없다. 파출부부터 막일까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모조리 다했다.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 <BR>그랬던 덕분이었을까? 피부관리숍을 할 정도가 되면서 생활에도 숨통이 조금 트였다. 그러나 여전히 돈은 그녀 삶의 전부였다. 아침 9시 30분부터 밤 9시, 10시까지 물 만난 고기마냥 몸 안 사리고 일을 했다. <BR>“정말 죽어라 일하고 한 번 들어온 돈은 절대 쓰지 않는 악착을 떨어가며 돈을 모았어요.&nbsp; 그렇게 해서 집까지 장만했어요. 그런데 누가 시샘이라도 한 걸까요? 또 다른 시련이 제 앞길을 가로막고 나설 줄 짐작조차 못했어요.” <BR><BR><STRONG>직장암 3기 진단을 받다!</STRONG><BR>2003년 10월 피부관리숍을 할 때였다.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암 검진을 무료로 해준다는 검진 통보서가 날아들었다. 잘됐다 싶었다. 그 즈음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BR>“언제부턴가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어요. 거기다가 눈은 늘 충혈돼 있기 일쑤고, 젊었을 때부터 골칫거리였던 만성변비 증상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으니까요.”</P>
<P><BR>병원에 가볼 생각은 아예 못했단다. 돈이 아까워서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공짜로 해준다니…. 마음이 혹했다. <BR>가까운 동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그런데 검사를 마친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대변에 피가 섞여 있다면서 재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P>
<P><BR>박금순 씨는 생각했다. 치질 때문일 거라고. 2000년도에 치질 수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재발했나보다 여겼다. <BR>그러나 며칠 후 대장내시경 검사를 해본 결과는 그녀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마취 상태에서 어렴풋이 들렸던 말은 암이었다. 의사는 말했다. 99% 암이라고. 직장암 3기라는 진단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 나이 50세 때의 일이다. </P>
<P><BR>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첫 느낌은 어떠했을까? 의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BR>“이제 좀 쉬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암=사망선고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해봤어요. 암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거니와 워낙 살아온 지난 세월이 힘든 터여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겼으니까요.” <BR>수술 일정이 잡히고,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다. 모두들 힘들어 하는 항암치료도 거뜬히 이겨낸 그녀다. </P>
<P><BR>그런대로 견딜 만했다는 게 그녀의 대답이다. “구토가 나면 구토한 걸 삼켜버렸어요. 항암주사를 맞고도 온 병원을 돌아다닐 정도로 엽기적(?)이었다고 할까요. 제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니까 암세포도 ‘이 몸은 구토를 해봐도 소용이 없구나.’ 체념한 듯 더 이상 구토가 나지 않았어요.” </P>
<P><BR>그렇게 1년 정도 항암치료를 했다. 그 와중에서도 피부관리숍은 악착같이 운영했지만 그리 오래 하지 못했다. 기운 딸리고 피곤하고…손님은 나날이 줄어들면서 어쩔 수 없이 숍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새롭게 시작한 것이 있었다. 공부였다. 주부학교에 입학하여 때늦은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BR><BR><STRONG>직장암, 폐로 전이되다</STRONG><BR>
<TABLE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50 align=right>
<T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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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IMG alt=2.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3/03/126761537797.jpg" width=15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민요대회에서의 박금순 씨. 그녀의 실력은 수준급이다.</TD></TR></TBODY></TABLE>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큰 기쁨이었다. 한문도 배우고 수학공식도 외우고 영어 단어도 암기하면서 언제나 목말랐던 배움의 갈증을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작한 김에 대학까지 가고 싶었다. 그래서 새벽 2~3시까지도 책과 씨름했다. 너무 무리한 탓이었을까? </P>
<P><BR>3개월마다 하던 정기검진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왼쪽 폐 아래쪽에 암세포가 발견됐던 것이다. 직장암 수술을 한 지 꼭 19개월 만의 일이었다. 2005년 5월 또다시 수술대 위에 누워 폐의 일부를 떼어냈고, 12번의 항암치료를 했다.</P>
<P><BR>“비로소 암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소름이 확 돋더군요. 수술만 잘 되면 끝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언제든 또 다른 얼굴로 몸 이곳저곳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암이었던 거예요.”<BR>암의 무서움을 실감한 박금순 씨. 이때부터 그녀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못다한 만학의 꿈을 이뤄보겠다며 시작한 주부학교도 그만두고 암 공부를 새롭게 시작했다. </P>
<P><BR>암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브로콜리가 암에 어떤 작용을 하고 시금치를 먹으면 어떻고…. 하나하나 새롭게 알아가는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BR>그렇게 암의 정체를 알아가면서 살아가는 방식도 바꾸기 시작했다. 먹는 것부터 바꾸었다. </P>
<P><BR>●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체온과 같은 온도의 물을 한 잔 마셨다. </P>
<P>● 또 무+무잎+우엉+당근+표고버섯을 푹 고아 수프처럼 만든 야채수프를 세 끼 식사 40분 전에 꼭꼭 먹었다. </P>
<P>● 식단은 모든 사람들이 다 먹는 음식 위주로 먹되 중복되지 않게 먹었다. 아침에 시금치나물을 먹었다면 점심에는 무나물을 먹었다. </P>
<P>● 밥은 현미잡곡밥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오래 씹었다.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30분을 씹을 정도로 오래 씹었다. </P>
<P>● 배부른 사람들의 사치로 여겼던 운동도 시작했다. 하루에 4km를 걷는 것부터 시작했다. </P>
<P>● 사는 곳에도 변화를 주었다. 충주, 춘천 등 공기 좋은 곳을 찾아 마치 유람을 다니듯 그렇게 살았다. </P>
<P><BR>그랬던 덕분이었을까?&nbsp; 폐암 수술 후 원인도 알 수 없고 마땅한 치료법도 없어서 적잖이 애를 끓이고 있던 혈변이 뚝 멈췄다. <BR>“너무나 걱정스러웠던 혈변이었어요. 변을 볼 때마다 혈변이 나왔고 피가 모자라 피주사까지 맞아야 했으니까요. 병원에서는 원인도 알 수 없고, 마땅한 치료법도 없다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죠.”<BR>그 혈변이 멎었던 것이다. 박금순 씨는 그때의 그 기쁨은 암이 다 나은 것처럼 여겨지더라고 말한다. <BR><BR><STRONG>웃음과 민요 접목한 새로운 항암생활 </STRONG><BR>그렇게 애를 끓이던 혈변이 멎고 하루하루 살만하다고 느끼던 어느 날, 어쩌다 살짝 넘어졌는데 팔이 부러졌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의 말이 골다공증이라고 했다. <BR>골다공증? 그게 뭐야? 이제 조금 살만해지니까 또다시 골다공증? 신이 원망스러웠다. 두 번의 암 수술로도 부족했던 걸까? 1년 넘게 나오던 혈변으로도 성에 안 찼던 걸까? 신이 원망스러웠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 너무도 야속해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봇물을 이루었다. </P>
<P><BR><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3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3/03/126761537806.jpg" width=272>“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나 싶어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BR>그러면서 찾아온 것이 우울증이었다. 혹독했던 지난 세월, 두 번의 암 수술,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시련…. 살고 싶지 않았다. </P>
<P><BR>그런 그녀에게 주부학교 다닐 때 알던 스승이 병문안을 왔다가 권해준 것이 있었다. 웃음치료였다. 살아온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웃고, 아픈 것 잊으려고 웃었다. 한숨 날 때도 웃고, 절망스러울 때도 허허~ 웃었다. 때로는 공허한 웃음이었고, 때로는 슬픈 웃음이었지만 그렇게 웃었다. </P>
<P><BR>“참으로 신기한 것이 한 번 웃고 나면 슬픔이 사라지고 마음도 어느덧 편해진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웃었어요. 특히 웃을 때는 15초를 웃어야 우리 몸의 엔도르핀이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해서 하하~ 호호~ 킥킥~ 자지러지듯 웃고 또 웃었어요.” <BR>그 여세를 몰아 웃음치료사 1급 자격증까지 땄다. 그러자 얼굴에는 서서히 핏기가 돌았고 우울증도 없어졌다. 살맛이 났다. 삶에 활력이 생겼다. </P>
<P><BR>그런 그녀에게 민요는 또 하나의 삶의 즐거움이다. “한창 웃음치료를 배우고 있을 당시 우연히 동네 복지관을 지나다가 민요소리를 듣게 됐는데 그것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더군요.” <BR>그래서 배우기 시작한 민요는 웃음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BR>오늘도 웃고 살고 장구 치면서 민요를 부르는 박금순 씨. 6개월마다 한 번씩 하는 정기검진에서 그녀의 건강은 쾌청이다. 암세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 모두가 웃고 살고 장구 치며 민요 부르며 산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P>
<P><BR>그런 탓에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이 가진 행복을 나눠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웃음강사로 활동하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웃음과 민요를 전파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BR>그런 그녀가 암환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다. 살고자 하는 생각은 내려놓지 말라는 것이다. 암이 머리에 있던, 허리에 있던 살고자 한다면 암세포가 제 먼저 알고 꼼짝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늘 간아 사랑한다, 장아 사랑한다, 폐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면 간도 장도 폐도 알아듣는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BR><BR><STRONG>직장암에서 폐암까지 이겨낸 박금순 씨의 하루 </STRONG></P>
<P>1. 아침 6시 20분 일어나서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마신다. </P>
<P>2. 풍욕을 30분간 실시한다. 옷을 다 벗은 뒤 이불을 덮고 케겔운동을 한다. 케겔운동은 하루에 두 번 정도 하고 한 번 할 때는 40회 정도 한다. 나체일 때는 껄껄, 하하, 호호 웃으면서 두 손가락 맞부딪히기 운동을 한다.</P>
<P>3. 그런 다음 얼굴 근육 움직이기 운동을 한다. 눈동자를 굴리고 광대뼈를 실룩거려보고 입도 비틀어보고…. 하루에 한 번씩 한다. 얼굴에는 온몸 장부의 대응점이 있어 근육운동을 해주면 좋다고 믿는다. </P>
<P>4. 아침밥 먹기 40분 전에 야채수프를 한 잔 마신다. </P>
<P>5. 아침밥 먹기 전에 사과 반쪽과 고구마 반쪽을 먹는다. 중금속과 노폐물 제거에 좋은 것 같다고 말한다. </P>
<P>6. 아침밥은 8시에 먹는다. 현미밥과 표고버섯, 시금치, 미역국 등 여러 가지 나물 반찬을 골고루 먹는다. </P>
<P>7. 오전 10시에는 뒷산에 오른다. 왕복 8km를 늘 걷는다. 이때 민요를 들으면서 장단을 맞춰가며 운동을 한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소나무를 관중삼아 민요를 부른다. 마음껏, 목청껏 민요를 부르면 눈물이 난다. 기쁨의 눈물이 난다.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 </P>
<P>8. 점심은 아침과 다른 색깔의 채소와 과일로 메뉴를 구성한다. </P>
<P>9. 오후 2시에는 장구를 치면서 민요를 부른다. 혼자서 쿵짝쿵짝 신명나게 논다. 행복한 눈물이 또 난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여자가, 살기 위해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믿었던 여자가 지금 장구 치면서 민요를 부르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서 또 운다. 울고 웃는다. 공자, 맹자, 순자의 스승은 웃자라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또 웃는다. 버리자 두려움을~ 하면서 하하 웃고, 마시자 건강을~ 하면서 호호 웃는다. 15초간 웃는다. 온몸으로 웃는다. </P>
<P>10. 저녁식사는 가볍게 한다. 소화가 잘 되는 브로콜리 3쪽, 양배추, 깻잎 등을 많이 먹는다. 팔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김치 양념으로 먹는다. </P>
<P>11. 저녁식사 후에는 족욕을 한다. 몸의 노폐물을 빼주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P>
<P>12. 저녁 9시 30분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 </P>
<P>&nbsp;</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712</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3-03 19:45:33</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폐암 4기 이겨낸  이태석 씨 희망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최고의 항암제입니다”</title>
			<description><![CDATA[<P>“나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BR>그의 첫마디다. 지금도 3개월에 한 번씩 꼭꼭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조금 의외다. “암 덕분에 무슨 일이든지 좋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P>
<P><BR>그런 탓에 지금의 그에게는 세상사 모든 일이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일들뿐이다. 걱정이 되고 고민이 되지 못한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던 이태석 씨(67세). 그것은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았다. 왜 걸렸는지 이유도 모른 채 절망했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말한다. 그때의 그 절망과 원망은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됐다고. 그런 그가 털어놓는 폐암 진단, 그리고 그 후 8년 세월에 묻어있는 이야기를 들어본다.</P>
<P><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P>
<P>&nbsp;</P>
<P><STRONG>2002년 6월 24일의 악몽 </STRONG><BR><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0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2/01/126500723736.jpg" width=300>그날은 당뇨 합병증을 검사하는 날이었다. 40대부터 앓기 시작한 당뇨는 이태석 씨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뇨 수치가 150을 넘어섰지만 방치해둔 상태로 10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P>
<P><BR>그러나 오십을 넘어서면서 당뇨 수치는 점점 올라가 200~280을 오르내렸다. 설상가상 매스컴에서는 당뇨 합병증의 무서움을 알리면서 겁을 주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이때부터 하루 한 알 당뇨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일 년에 한 번씩 당뇨 합병증 체크도 시작했다. 그렇게 해온 지 5년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2002년 3월의 일이다. </P>
<P><BR>그날도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당뇨 합병증을 검사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검사를 마친 담당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폐에 뭐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혹시 폐렴일지도 모르니까 3개월 정도 두고 보자.”고 했다. </P>
<P><BR>3개월이 지나 다시 검사를 했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심상찮다.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한 말은 기가 찼다. 폐암이라고 했다. 그것도 4기 폐암이라고 했다. <BR>“왜 내가 폐암에 걸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담배를 그리 많이 피우는 편도 아니었고, 마땅히 폐를 나쁘게 할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으니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립암센터에 가서 재검사를 했습니다.” </P>
<P><BR>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돌이킬 수 없는 폐암 4기였다. 의사는 말했다. 수술보다는 항암치료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BR>‘말기라서 수술도 못하는가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nbsp; 뚝 멎었다. 들리는 것이라곤 오로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숨소리뿐이었다. 의사가 등 뒤에다 대고 뭐라고 말을 했지만 그는 조용히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숱한 사람들이 오고가는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꼭 감았다. </P>
<P>&nbsp;</P>
<P>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병원 복도에 오고가는 사람이 뜸해질 무렵 이태석 씨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다.&nbsp; </P>
<P>‘고치면 되지 뭐! 하나님이 고쳐주실 거야!’ <BR>그것은 2002년 6월 24일, 이태석 씨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P>
<P>&nbsp;</P>
<P><STRONG>‘고치면 되지 뭐!’ 그래도 투병은 힘들어</STRONG><BR>‘고치면 되지 뭐!’ </P>
<P>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고 이태석 씨가 가장 먼저 마음에 새긴 말이었지만 문득문득 파고드는 불안감은 참으로 털어내기 힘든 것이었다. 기가 막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식들이었다. 다행히 딸 둘은 결혼을 시킨 상태였지만 하나 남은 아들이 못내 걸렸다. 결혼식날 아내 혼자 쓸쓸히 앉아 눈물짓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왔다. </P>
<P><BR>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고치면 되지 뭐!’ <BR>병원에서 권한 대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피를 말렸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피까지도 말렸다. </P>
<P><BR>“일단 음식을 못 먹으니까 팔 하나 들 힘도 없어지면서 삶의 의욕까지 꺾어버리더군요. 그러다보니 우울증까지 엄습하면서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 ‘이렇게 살아 무엇 하나?’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면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으니까요.” </P>
<P><BR>이런 그에게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은 큰 힘이 됐다고 말한다. 아내의 지극 정성은 눈물겨웠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암 환자에게 좋다며 민물잉어를 고기 시작했고, 상황버섯을 달여 수시로 먹도록 했다. 암에 좋다고 하면 열일 제쳐두고 매달렸다. <BR>그러나 폐암 4기에는 그런 정성도 잘 통하지 않았다. 고생고생해가며 6번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CT를 찍어본 결과 몸 상태는 더 나빠져 있었다. </P>
<P><BR>“담당의사는 다시 항암치료를 하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어요. 암세포보다 제가 먼저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BR>결국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포기했다. “그때의 제 생각으로는 그냥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사는 날까지 살다가 생을 마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폐암 4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P>
<P><BR>비로소 폐암 4기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조금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힘든 항암치료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담당의사가 주저하면서 소개해 준 것이 있었다. <BR>“이레사였어요. 그 당시 막 개발되어 한창 임상시험 중이었는데 의사가 솔직히 말하더군요. 이 약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고, 또 환자에게 직접 써본 경험도 없다고.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최선책이라면서 임상시험에 한 번 참가해보라고 권하더군요.”</P>
<P><BR>이것저것 따질 처지도 아니었던 이태석 씨. 이레사의 임상시험에 참가했다. 2002년 9월부터 하루 한 알씩 이레사를 복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P>
<P>&nbsp;</P>
<P><STRONG>이레사 임상시험에 참가하다 </STRONG><BR>
<TABLE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right>
<TBODY>
<TR>
<TD><IMG alt=02.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2/01/126500723746.jpg" width=30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이태석씨는 병은 누구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이기는 힘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TD></TR></TBODY></TABLE>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태석 씨. 이레사를 열심히 복용하면서 이때부터 그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일이 있었다. 등산이었다. 하루 일과처럼 늘 산에 올랐다. 서울 근교의 수락산과 도봉산은 그에게 좋은 친구가 돼 주었다. <BR>등산을 다녀오면 성경책을 읽었다. 마음속에 잡념이 떠오르지 않도록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 성경책은 많은 위로가 돼 주었다고 말한다. </P>
<P><BR>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흐르고 세 달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독한 항암치료로 잃었던 입맛이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체중도 조금 늘었다. 피곤한 증상도 많이 가셨다. 살맛이 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BR>궁금했다. ‘혹시 좋아졌나?’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주던 의사는 별로 말이 없었다. ‘고만고만하다’고만 했다. 잠깐 실망스러웠지만 생각을 바로 바꿨다.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은 게 어디야?’ 다행으로 여겼다. </P>
<P><BR>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하루 한 알 이레사는 늘 복용하고 등산을 갔다오면 성경책을 읽는 일과도 변함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체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BR>2003년 11월, 그 날도 정기검진날이었다. 그런데 검사를 마친 의사가 불쑥 말했다. “내년에나 봅시다.” 이태석 씨는 그 날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P>
<P>“한 달은 건너뛰어도 된다는 의미였어요. ‘이제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더군요.” </P>
<P>&nbsp;</P>
<P><STRONG>다시금 부르는 희망의 노래 </STRONG><BR>
<TABLE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
<TBODY>
<TR>
<TD><IMG alt=03.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2/01/126500723752.jpg" width=30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이태석씨는 오늘 하루 열심히 살 수 있음에 만족한다.</TD></TR></TBODY></TABLE>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0년 1월 현재 이태석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BR>“지금도 이레사를 하루 한 알씩 먹고 있고, 3개월에 한 번씩은 병원에 들릅니다. 검사를 마친 의사에게 상태를 물어보면 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고만고만하다.’고.” </P>
<P><BR>하지만 이태석 씨는 알고 있다. 그 말속에 숨은 뜻을. 그것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기도 했다. <BR>“2007년도에 TV건강프로인 ‘생로병사’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2004년도 폐 사진과 2007년도 폐 사진을 비교해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2004년도 사진에는 선명하게 보이던 폐암 흔적이 2007년 사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P>
<P><BR>의사에게 물어봤다. 완쾌된 거냐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BR>“만약 자식이 학교에서 100점 받아왔다고 해서 덮어놓고 잘했다고 칭찬만 하시겠어요? 아니면 반 학생이 몇 명이고, 그 중에서 100점 맞은 학생은 또 몇 명인지 이것저것 따져보시겠어요? 지금 당장 좋아졌다고 해서 나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하루 잘 지내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P>
<P><BR>지금도 이 말은 이태석 씨에게 금과옥조와도 같다. 보루처럼 여기며 산다. 암이라는 건 다 나았다가도 언제 다시 고개를 내밀지 모른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치’라는 개념을 잊어버리고 산 지 오래다. 그저 오늘 하루 열심히 살 수 있음에 만족한다.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하고, 아침 8시면 소일거리로 시작한 두유대리점에서 땀 흘리며 일한다. </P>
<P><BR>그런 그에게서 폐암 환자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활기차고 강인해 보인다. 당뇨 때문에 인슐린 주사도 늘 맞아야 하지만 언제나 자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BR>“병은 누구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해? 억울해! 원망만 하고 있어서는 결코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P>
<P><BR>원망 대신 긍정의 힘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태석 씨. 살 수 있다는 긍정의 힘, 불행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BR>물론 당장의 불행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갖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웃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웃고, 불행한 생각이 들면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라고 주문한다. 그것이 암을 이기는 최고의 항암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P>
<P><BR>&nbsp;</P>
<P><STRONG><FONT color=#307f00>이태석 씨의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생활 속으로…</FONT></STRONG></P>
<P><FONT color=#307f00>암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얼 먹고 또 어떻게 생활할까? 아마 모두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태석 씨는 어떨까? <BR>“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지만 그런 건 없다.”는 게 그의 답변. 그런 그가 소개하는 일상은 결코 유별나지 않다. 몇 가지 원칙만 있을 뿐이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FONT></P>
<P><FONT color=#307f00></FONT>&nbsp;</P>
<P><FONT color=#307f00>1. 나는 늘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BR>2.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BR>3. 늘 웃으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BR>4. 암 덕분에 삶이 더 충만해졌다고 생각한다. <BR>5. 된장이나 고추장은 직접 담가 먹는다. <BR>6. 덜 맵게, 덜 짜게 신선한 것 위주로 먹는다. <BR>7. 기름에 튀긴 음식은 되도록 피한다. <BR>8. 화학조미료 대신 멸치와 새우, 다시마 등을 조미료 대신 쓴다. <BR>9. 민들레 + 버섯 3가지 + 녹차+ 둥굴레를 푹 끓여서 물처럼 늘 마신다. <BR>10. 육류는 가급적 피한다. </FONT></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705</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2-01 15:55:53</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간염에서 간암·폐암까지 암과의 사투 9년 이겨낸 유익현 씨 체험고백</title>
			<description><![CDATA[<P>“살 수 있다는 의지만 있으면 암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P>
<P>발단은 간염이었다. 그것이 화근의 싹이 될 줄은 짐작조차 못했었다. 간염에서 간경화로, 간암에서 폐암으로…. 속수무책 진행되는 암세포의 맹공 앞에서 의사는 점점 할 말을 잃어갔고, 가족들은 몰래몰래 눈물을 훔쳤다. 누가 봐도 힘든 싸움. 그래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 전주에 사는 유익현 씨(62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암과의 기나긴 사투에서 새생명을 얻은 그가 오늘 환하게 웃고 있는 사연을 들어본다. <FONT color=#0099ff>글 | 이은혜 기자</FONT></P>
<P>&nbsp;</P>
<P><FONT size=3><STRONG>간염, 그것쯤이야? </STRONG></FONT><BR><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0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1/29/126476327269.jpg" width=290>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30대 초반 예비군 훈련을 갔다가 헌혈을 했는데 비활동성 B형 간염 보균자로 나왔던 것이다. <BR>하지만 유익현 씨는 ‘그까짓 것’했다고 한다. 별다른 증상도 없었고,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 잔 하는 기쁨도 맛보고, 생활에서도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P>
<P><BR>그러던 어느 날, 아니 정확히는 40대 초반의 어느 날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날도 퇴근길에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맥주잔을 기울이던 그는 깜짝 놀랐다. 언제나 술술 잘 넘어가던 술이 한 모금도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마시기만 하면 구역감이 일어났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P>
<P><BR>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날이 밝자마자 동네 병원으로 달려갔다. 검사 결과 간염이 만성으로 진행됐다면서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근처 대학병원에도 갔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기적인 검사를 꼭꼭 해야 하고, 치료약도 반드시 복용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졌다.</P>
<P><BR>이때부터 유익현 씨는 병원에 다니는 틈틈이 간염에 좋다는 약, 좋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기 시작했다. 최고의 간 전문가도 만나보고, 좋다는 민간비방도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면 나을 줄 알았다. <BR>그러나 간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병이 아니었다. 2001년, 새로운 모습으로 유익현 씨의 삶을 뿌리째 뒤흔들어놓았다. 그것은 그의 나이 54세 때의 일이었다. </P>
<P>&nbsp;</P>
<P><FONT size=3><STRONG>간암 진단, 수술은 불가? </STRONG></FONT><BR>2001년 봄 어느 날, 그날은 정기 검진 날이었다. 그런데 담당의사가 CT를 한 번 찍어보자고 했다. 일주일 후 결과를 들으러 갔더니 이번에는 MRI도 찍어보잔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간에 1.8~2cm 정도의 암세포가 생겼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간의 가장자리에 암이 붙어 있으니 수술로 떼어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P>
<P><BR>암이라는 말에 놀란 가슴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곧바로 입원을 했다. 숱한 검사가 이어졌고 수술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BR>“그런데 느닷없이 담당의사가 찾아와 수술을 할 수 없다더군요. 암세포가 간의 뒤쪽 가장자리에 붙어 있어서 옆구리까지 절개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큰 수술이 된다는 거였어요.” <BR>결국 수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색전술이었다. 그러나 색전술은 결코 치료의 끝이 아니었다. 1차 색전술을 받고 한 달 후 병원에 갔더니 다시 암이 생겼다며 색전술을 또 해야 한다고 했다. <BR>안되겠다 싶었다. 큰 병원에 가보자며 서둘러 서울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2차 색전술을 했다. <BR>“그런데 뭐가 잘못됐던 걸까요? 2차 색전술을 마치고 난 뒤에는 통증이 너무 심하고 입맛이 똑 떨어져 밥 한 톨 삼킬 수가 없었어요. 한 끼에 2~3숟가락도 먹지 못한 상태로 한 달 정도 지나니 몸이 해골처럼 변해가더군요.” </P>
<P><BR>사정이 이렇게 되자 그의 아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암세포보다 못 먹어서 죽게 생겼다며 사방팔방으로 수소문 하고 다녔다. <BR>그런 정성이 통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간암을 이겨낸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사람으로부터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P>
<P><BR><FONT size=3><STRONG>죽을 먹으면서 바보처럼 살다! </STRONG></FONT><BR>“간암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 분을 만난 것은 지금 생각해도 큰 행운이었던 같아요. 그 분은 광주의 한 약사님을 소개해주면서 바보죽 요법을 꾸준히 따라해 보라고 권하더군요.” <BR>그렇게 해서 만난 약사는 죽을 쑤어 먹으면서 반드시 바보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P>
<P><BR>죽을 쑤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현미+찹쌀현미+쥐눈이콩+검은깨를 생으로 갈아서 죽으로 쑤되, 소금 간을 하지 않는 무염식이어야 하고 먹을 때는 반드시 100번 이상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조한 말, “늘 바보처럼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P>
<P><BR>그러나 소금 간도 안 한 무염식 죽을 먹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넘어가지가 않았다. “죽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는 물로 삼켰어요. 억지로 먹어서인지 소화도 잘 안 돼 바로 설사를 해버리더군요. 이렇게 며칠 지나니 항문이 헐어버릴 정도였어요.” </P>
<P><BR>그래도 먹어야 살 수 있다며 애원하는 아내 앞에서 억지로, 억지로 죽을 삼켰다. 그렇게 10일 정도가 지났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잃어버렸던 입맛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BR>먹을 수 있게 되자 몸은 바로 회복 기미를 보였다. 누렇게 보였던 얼굴의 황달기도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일주일마다 한 번씩 병원에 가서 하는 혈액검사에서도 뚜렷한 반응이 감지되었다. 알부민 수치도 좋아지고 암수치도 많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살 것 같았다.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P>
<P><BR>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스쳐 지나가던 TV의 한 장면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건강보조식품으로 암을 이길 수 있다는 보도였다. 실제 사례도 소개되었다. 마음이 혹했다. 무엇보다 하지 말라는 금기사항도 별로 없어 더 매료됐다. 죽요법 대신 그 방법을 따라해 보기로 했다. </P>
<P><BR>“그러나 그 시도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나타났어요. 얼마 되지 않아 간암수치는 확확 올라갔고, 병원에서는 암이 재발됐다면서 다시 색전술을 해야 된다고 하더군요.” <BR>결국 세 번째 색전술을 했다. 그래도 암 수치는 떨어질 줄 몰랐다. 의사는 또다시 색전술을 하자고 했지만 그는 망설였다. 그 즈음 겨드랑이를 만지면 칼로 베이는 듯 선득선득 느껴지는 기분 나쁜 느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P>
<P>&nbsp;</P>
<P><FONT size=3><STRONG>폐로 전이된 암… 수술도 힘들다! </STRONG></FONT><BR>
<TABLE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90 align=left>
<TBODY>
<TR>
<TD><IMG alt=02.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1/29/126476327275.jpg" width=29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유익현씨는 무염식 죽을 150~200번씩 꼭꼭 씹어 먹었다. 암이 완치된 지금은 죽과 잡곡밥을 섞어 먹는다.</TD></TR></TBODY></TABLE>왠지 모를 불안감이 목안에 든 가시처럼 하루하루를 불편하게 하자 유익현 씨는 서울로 향했다. 그동안의 진료 차트를 챙겨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리고 가슴 사진부터 찍었다. 선득선득 느껴지는 기분 나쁜 정체를 알고 싶어서였다. </P>
<P><BR>오전에 찍은 가슴 사진 결과는 오후에 바로 나왔다. 사진을 보고 있던 의사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간암세포가 폐로 전이된 것 같습니다.” <BR>그러면서 하는 말이 “수술을 꼭 원하면 해줄 수는 있지만 그 가능성은 30% 이하”라면서 “수술을 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P>
<P><BR>숨 막히는 몇 시간이 흘렀다. 죽고 사는 문제다보니 아무도 선뜻 말문을 열지 못했다. <BR>“그제서야 비로소 어쩌면 내 인생이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그전에는 간암이라고 해도 죽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거든요.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머릿속으로 몇 번 죽어도 보고 살아도 보고 하면서 내린 결론은… 수술은 하지 말자는 거였어요.” </P>
<P><BR>그 대신 그가 이 악물고 결심한 게 있었다. 절대 이 병으로는 죽지 않겠다는 오기였다. </P>
<P>&nbsp;</P>
<P><FONT size=3><STRONG>어떻게든 낫게 해보리라! </STRONG></FONT><BR>수술을 포기한 유익현 씨는 ‘어떻게든 낫게 해보겠다.’는 오기를 품고 의사에게 물었다. 수술 대신 할 수 있는 게 뭔지. 담당의사는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그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이와 함께 그가 목숨 걸고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P>
<P><BR>“전에 하다가 너무 힘들어 포기했던 바보죽요법을 다시 시작했어요. 그때는 느슨한 마음으로 투정도 부려가면서 실천했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먹기 싫어도, 맛이 없어도 무염식 죽을 먹었고 기쁘지 않아도, 힘들어도 독한 마음으로 웃었어요.”</P>
<P><BR>
<TABLE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90 align=right>
<TBODY>
<TR>
<TD><IMG alt=03.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1001/29/126476327283.jpg" width=290></TD></TR>
<TR>
<TD style="LINE-HEIGHT: 120%; FONT-FAMILY: dotum; COLOR: #808080; FONT-SIZE: 11px; PADDING-TOP: 4px">유익현씨는 지금도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열고 나오면서 '하하하' 웃기부터 한다.</TD></TR></TBODY></TABLE>병원에 있는 그를 위해 아내는 새벽부터 일어나 죽을 쑤어 병원으로 날랐고, 개다리춤도 함께 추면서 웃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흘렀다. 그동안 18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바보죽요법도 죽을 힘을 다해 실천했다. 폐에 생긴 암세포는 어떻게 됐을까?&nbsp; 궁금했다. </P>
<P><BR>“검사를 해보니 암 덩어리가 5mm 정도 줄어들었다더군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한두 달 만에 암세포가 없어질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의사의 말을 듣고 퇴원을 했어요.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할 게 없었으니까요.” </P>
<P><BR>퇴원을 한 뒤로는 더 철저히 바보처럼 살았다.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 열고 나오면서 하하하 웃음소리로 온가족을 깨웠고 소금 한톨 안 들어간 무염식 죽을 150~200번씩 꼭꼭 씹어서 먹었다. 유행가 틀어놓고 박자 맞추며, 따라 부르며 하루 5끼 죽을 먹었다. 틈틈이 영양제 맞기, 알부민 맞기, 녹즙 마시기, 붕어즙 먹기도 병행했다. 모든 생각은 접어두고 오로지 바보처럼 웃으면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P>
<P><BR>그랬던 덕분이었을까? 한 달 후 다시 대학병원에 가서 정기 체크를 했다. 그런데 방사선 주치의가 느닷없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폐에 있던 암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뻤다. 살았구나 싶었다. </P>
<P><BR>내과 주치의도 찾아가 체크를 했다. 방사선 치료 때 910까지 올라갔던 암수치가 120으로 떨어졌다며 놀라워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5년, 유익현 씨는 내과 주치의로부터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P>
<P><BR>“입원 당시 절망적이었는데 이렇게 좋아진 사례는 만 명당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하다면서 앞으로는 혈액검사만 하면서 지켜보자고 하더군요.” </P>
<P><BR>이때부터는 집근처 병원에 다니면서 혈액검사만 해오고 있다는 유익현 씨. 2009년 12월 현재 그의 몸에 남아있는 암의 흔적은 암수치 1.3이다. 주치의는 완치 판정을 내린 상태다. 이 모두가 바보처럼 웃고 산 덕분이라고, 바보죽요법을 꾸준히 실천한 덕분이라고 유익현 씨는 믿고 있다. 그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암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암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면 그때부터 살 길이 열린다고 당부한다. </P>
<P><BR>&nbsp;</P>
<P><STRONG><FONT color=#ff6600>유익현 씨가 전하는&nbsp; 암 이기는 비결 12계명 </FONT></STRONG><BR>1. 무조건 웃어라. 억지로 웃는 웃음도 항암제가 된다. 바보가 되는 것이 지름길이다. <BR>2. 낙천적인 생활습관으로 바꾸어라. <BR>3. 암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친구로 삼아라. <BR>4. ‘나는 살 수 있다.’ 확신을 가지고 적극 대처하라. <BR>5. 암과의 싸움을 장기전이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대처하라. <BR>6. 나에게 맞는 치료방법을 찾아서 100% 믿고 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BR>7. 가급적이면 내가 하려고 하는 치료법으로 완치된 환자를 한두 명이라고 만나보고 신뢰를 가지고 시작하라. <BR>8. 밥 한 수저를 먹더라도 150~200번을 꼭꼭 씹어서 먹어라. <BR>9. 암이 좋아하는 마음, 생각을 만들지 말라. 즉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라.<BR>10. 암이 좋아하는 음식을 절대로 섭취해서는 안 된다. 기름지고, 동물성 지방이 풍부하고 화학적인 것, 인공적인 것은 되도록 멀리하라. <BR>11. 암환자는 최대한 잠을 많이 자 두어라.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것은 완치의 지름길이다. <BR>12. 모든 것에 감사하라. 가족, 친척, 친구 등 심지어 사물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697</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10-01-29 19:43:45</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폐암 이겨낸 김재일 씨 희망가 “생명의 숲에서 새생명 얻었어요”</title>
			<description><![CDATA[<P>일체유심조 一切唯心造, 생태환경운동가 김재일 씨에게 붙이고 싶은 수식어다. 폐암 진단 후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마음 다스림에 전념하고 있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이 물질적인 치료법을 먼저 찾는 데 비해 마음 다스림이 우선이라는 믿음은 통상의 암 환자들에게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가장 지혜로운 암 투병이 아닐까 싶다. 그는 생명운동을 통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P>
<P><FONT color=#0099ff>글 | 건강칼럼니스트 문종환</FONT></P>
<P>&nbsp;</P>
<P><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0912/03/125981565889.jpg" width=290>김재일 씨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당시에는 화학요법 중이었던지라 머리카락이 다 빠진 상태였다. ‘어떻게 변했을까?’ 늘 궁금했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여전히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랬던 터라 더 기다려졌던 만남.</P>
<P><BR>3년 만에 만난 그의 얼굴은 참 맑고 밝아 보였다. 항암 치료 중의 초췌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근황을 물었다. 3개월 전에 검사받은 바로는 ‘암 활동 정지’였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기침을 했는데 기관지에 탈이 생긴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 강의, 세미나 연구 활동 등으로 쉴 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걱정이 앞섰지만 잘 이겨나갈 것이란 믿음은 있다.</P>
<P>&nbsp;</P>
<P><STRONG>시련은 새로운 삶의 기회 </STRONG><BR>김재일 씨는 환경운동가다. 교직을 떠나 자유롭게 생명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모든 생명은 자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정작 생명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에게 2003년 가을, 혹독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가족문제가 발단이 되어 환경생태운동가로서 새만금갯벌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도 감기, 천식, 폐암 진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련 앞에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P>
<P><BR>암 진단을 받자 지인으로부터 확실하게 고칠 수 있다는 말만 듣고 그 분의 처방(침, 뜸, 한약 등)대로 했으나 암이 커졌고, 결국 치료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치료를 기본으로 하면서 채식 위주의 식단과 생즙 등 몸의 자연치유력을 증강시켜주는 생활요법을 병행했다. </P>
<P><BR>그러나 수술 후 1년 6개월 만에 재발돼 다시 항암 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겨울, 방송 중 기침이 심해 병원을 찾았고, 천식과 종양이 커져 기관지를 누르고 있다는 진단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암 환자가 거치는 과정을 그도 역시 지나왔다. 다른 환자와 다른 것이 있다면 생사를 넘나드는 힘든 과정에서도 마음의 동요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지금 일생에서 가장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일에 대한, 또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집념이 그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nbsp;&nbsp;&nbsp;&nbsp;&nbsp; </P>
<P>&nbsp;</P>
<P><STRONG>암에 대한 인식, 이제는 바꿀 때</STRONG><BR><IMG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alt=2 align=righ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0912/03/125981565897.jpg" width=290>2003년 암 진단을 받았으니 올해로 6년째다. 의료계에서 흔히 말하는 5년을 넘어섰다.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투병에 전념할 수 없었으나 경과는 크게 나쁘지 않다. 60세를 넘긴 그에겐 할 일이 너무 많다. 할 일을 하면서 투병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일에 대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고 암은 악惡이 아니라 선善이라는 것, 즉 원수처럼 생각할 게 아니라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이를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수명의 길고 짧음이 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닐진대 삶에 집착하는 것 자체는 올바르지 않다고 강조한다.&nbsp; </P>
<P>&nbsp;</P>
<P><STRONG>&lt;섬진강 대숲에서&gt;, &lt;산사의 숲-침묵으로 노래하다&gt; 저서 펴내</STRONG><BR>김재일 씨는 투병 중일 때도 집필을 포함한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살아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꼼꼼하고 자세히 살피는 마음,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 겸손하고 조화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그의 책은 우리가 살아있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P>
<P><BR>가을의 청명한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창가에 앉아 국화차 한 잔 손에 들고 고요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 권의 책이라도 읽는다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BR>그의 역작 &lt;산사의 숲-침묵으로 노래하다&gt;는 병원 치료를 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108개 사찰의 생태조사 결과를 사실상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가슴 설레면서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P>
<P><BR>수술한 곳이 채 아물기도 전에 몸은 이미 산에 올라가 있었고 항암 중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발길은 이미 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7년 동안 강원도 고성에서 해남,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녔다. </P>
<P><BR>2003년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약간 갈등을 했었다고. 그러나 시작한 일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암의 고통을 느껴볼 겨를도 없이 수천 수만리 길을 걸어서,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고 또 다녔다. <BR>사찰로 이어지는 대중교통이 없어 어떤 경우는 집을 나와 10번도 넘게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가며 타야 했다. 그는 자동차가 없다. 차를 가지고 다니면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없어서다. 모든 자연은 음미하는 맛이 있고 단지 스쳐 지나간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믿고 있다. 자연이 일러주듯 그렇게 천천히 가기를 고집하는 사람. 산사를 향해 오르는 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P>
<P><BR>산사의 숲에서 그려지는 자연, 그 중에서 겨울산은 큰 의미를 담고 있다. 빈사상태인 듯 보이나 실은 그 속에 엄청난 생명력을 만들면서 때를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겨울 숲은 단식을 끝낸 후 야위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 건강이 있다. 더 많은 생명을 만들고 보다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생명이 꿈틀거린다. 이 겨울 숲이 어쩌면 현재의 그의 모습이 아닐까? </P>
<P><BR>“숲은, 자연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저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서 행복한 편입니다. 언제나 치유 숲을 옆에 두고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시간을 따로 내서 산을 올라야 하지만 저는 늘 산에 있으니 즐겁기도 하거니와, 투병에 도움도 되고…. 그러니 행복하지 않겠습니까?”</P>
<P>&nbsp;</P>
<P><STRONG>몸뚱이에 집착하는 삶 거부하는 주인공 </STRONG><BR>늘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는 삶과 죽음의 문제. 그런데 이에 대한 김재일 씨의 관점은 조금 색다르다. 집착하는 삶을 거부한다. <BR>“삶은 제게도 너무 소중하지만 몸뚱이에 집착해서 자신을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은 결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물론 제 건강에는 마이너스 요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늘 지금 여기서 삶을 마감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요. 비록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수명의 전부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루를 살아도 무엇인가 해 놓고 죽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할 것입니다.” </P>
<P><BR>사실 죽음에 초연해지기란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안다. 수많은 암 환자들을 만나봤지만 이 문제는 말로써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 또 생사에 초연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이 말은 곧 ‘네 목숨이 아니니까 쉽게 말하지.’라는 반문이 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생사에 초연한 사람을 만나면 존경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P>
<P><BR>암은 마음의 응어리가 물질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응어리진 마음을 풀지 못하면 암도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물질적인 접근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심리적인 접근이다. 몸에 집착해서 그것에 매몰돼버리면 자신은 없어진다. 몸속에 마음이 갇혀서야 되겠는가? 집착과 의지는 다른 것, 한 걸음 물러나 진정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오늘 한 번 가져보자. </P>
<P>&nbsp;</P>
<P><FONT color=#009999>김재일 님은 <BR>경북포항生,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40대 초반에 문화 및 환경 운동을 시작, 사찰생태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사찰생태연구소 대표, 두레생태기행 회장, 두레문화기행 회장, 숲해설가협회 공동대표, 국립공원위원회 위원, (사)보리방송모니터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2008년 교보생명문화환경상(특별상), 제3회 서울시 환경상(단체부문)과 환경부장관 표창을 받았고, 제18회 불이상과 제3회 대원상을 수상했다.<BR>지은 책으로는 『생명산필』, 『생태기행(전3권)』, 『서울생태』, 『현장학습여행(전2권)』, 『숲이 희망이다(공저)』, 『전통생태학(공저)』, 『우리 민속 아흔아홉 마당(전2권)』 등이 있다. </FONT></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678</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09-12-03 13:44:38</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시한부 진단 2개월… 간암 말기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전시균 씨 희망가</title>
			<description><![CDATA[<P><STRONG>“덤으로 사는 삶…봉사하며, 베풀며 살고 싶습니다” </STRONG></P>
<P>인터뷰를 하러 학교로 달려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엇갈렸다. ‘시한부 진단 2개월 받은 환자가 어떻게 살아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BR>그를 만나고 보니 말기 암환자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30대 초반 정도의 건강해 보이는 몸과 마음을 가진 그에게 살짝 나이를 물어보니 40대, 깜짝 놀랐다. <BR><FONT color=#0099ff>글/ 건강칼럼니스트 문종환</FONT></P>
<P>&nbsp;</P>
<P><STRONG>세상의 슬픔</STRONG></P>
<P><IMG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alt=01 align=lef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0911/02/125713037681.jpg" width=290>“암이라고는, 그것도 시한부 2개월의 간암 말기 환자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식욕이 없고 졸음이 자주 오고 황달 증상과 옆구리 통증 등으로 동네병원을 찾은 것이 간암 말기 2개월 시한부 진단의 시작이었죠.” </P>
<P>&nbsp;</P>
<P>전시균 씨의 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울 K병원 검사 결과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에 전시균 씨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형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믿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병원을 찾았다. 서울 Y병원의 담당의사 역시 가능성이 없음을 내비쳤는데 그래도 한 번 해보자고 제안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기에 의사의 권유대로 치료를 시작했다. </P>
<P>&nbsp;</P>
<P>“항암화학요법(케모포트) 13차, 방사선(토모테라피) 20회를 병행했어요. 처음엔 간암 수치(AFP)가 2500까지 치솟는 최악이었습니다. 보통 AFP지수는 20 이하가 정상입니다. 수치가 너무 높자 병원에선 그냥 먹고 싶은 것 실컷 먹으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어느 정도는 포기한 듯 보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치료는 계속됐고, 항암 3차까지는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나 4차부터 드디어 항암 약기운이 도지는데 밥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과 무기력, 어지러움, 구토 등 정말 너무나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럴 때 다들 포기하는구나, 이래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더군요.”</P>
<P>&nbsp;</P>
<P><STRONG>아이들 눈망울 보며 절대 포기할 수 없어</STRONG><BR>간의 정중앙 부분에 9㎝가 넘는 암이 버티고 있어 수술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나마 가능성이 희박한 항암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가 전부인 상태. 그래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가지 치료를 강행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점차 그의 곁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정신적 공황상태는 물론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두 아이를 보면 절로 눈물이 났다. 아직 어린 두 아이를 생각하면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살점이 찢어져 나가는 아픔도 이겨냈다. </P>
<P>&nbsp;</P>
<P><STRONG>어머니의 사랑</STRONG><BR>전시균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가 그의 생명을 지켜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BR>그의 아내는 암 진단 후 눈물을 흘리는 일 이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병원에서의 시한부 진단, 남편의 생명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생각에 밤낮을 울음으로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고. </P>
<P><BR>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조금 남달랐다.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어디서 알아오셨는지 암에 좋다는 것을 하나씩 해주기 시작했다. 특히 음식에 많은 공을 들였다. 채식 위주의 식단을 차리는 것과 다슬기가 간에 좋다는 말을 듣고 섬진강까지 직접 내려가 다슬기를 구해 통째로 갈아서 푹 고아 주었는데 이것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회상한다. </P>
<P>&nbsp;</P>
<P><STRONG>발병 원인의 분석과 대처</STRONG><BR>전시균 씨는 자신의 암 발생 원인을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극도의 과로와 스트레스, 폭음, 식습관이 그것이다. 즉 심리적 스트레스와 몸을 만드는 음식이 문제였다는 것. 그래서 발병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결과제였다. 우선 스트레스ㆍ심리적 문제는 신앙에 의지하게 되었고, 음식문제는 식단 개선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물론 음주는 절대 금물.</P>
<P><BR>S고교 시설관리팀장으로 근무하면서 과로와 스트레스, 폭음이 이어졌고, 정신지체장애인 학교로 옮기면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정신지체장애인 학교로 옮긴 후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도 순간순간 발생하는 짜증과 스트레스를 스스로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P>
<P><BR>특히 수련회 기간 동안에는 잠도 자지 못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이것이 자신을 너무도 힘들게 했다. 학교를 옮긴 지 2개월 후인 2007년 6월, 옆구리 통증과 황달 등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있었다. </P>
<P><BR>암 진단 후 그는 살기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앙에 의지하면서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만약 다시 살 수 있다면 남은 삶은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신앙의 힘은 점차 힘을 발휘하여 정신지체아동들을 대하는 생각이 바뀌게 되었고, 지금은 오랜 친구처럼 그 아이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P>
<P><BR>“만약 암 진단을 받지 않았다면 제가 가지고 있던 정신지체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 깨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정말 편안해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포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어요.”</P>
<P>&nbsp;</P>
<P><STRONG>시한부 2개월을 깰 수 있었던 동력들</STRONG><BR><IMG style="MARGIN-LEFT: 15px; CLEAR: both" alt=02 align=right src="http://kunkang.co.kr/q/_sys/_upload/image/200911/02/125713037692.jpg" width=290>의학적 소견으로 2개월밖에 살 수 없다던 기간을 지나 벌써 2년이 지났다. 병원검사(CT) 결과 암이 없어졌다는 소식(2008년 11월, 암 완치 진단)을 듣고 뛸 듯이 기뻤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최근에 받은 검사에서도 이상소견은 없다. </P>
<P><BR>지금까지 그가 투병을 위해 했던 것들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병원 치료를 통해 선택적으로 암의 부피를 줄일 수 있었고, 신앙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왔던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생각들을 해소하였다. 몸을 만드는 음식은 최대한 친환경 자연식으로 하였으며, 특히 숲(자연)을 많이 활용하였다. 숲 활용에 대해서는 TV 생로병사 ‘숲’에 출연하기도 했다. </P>
<P><BR>“숲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숲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무차별 훼손하는 일이 많아요. 숲에 대한 고마움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보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칫 간과하기 쉬운 이 문제는 보다 원시안적인 시각으로 공론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P>
<P><BR>그렇게 전시균 씨의 ‘숲’ 예찬은 계속되었다. “아침 7시쯤 식사하고 숲으로 빼곡히 우거진 산으로 직행합니다. 오전 시간에는 나무의 기가 발산되니까 되도록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특히 소나무나 편백나무 밑에 있습니다. 간에 무리가 가면 안 되니까 산책 정도의 가벼운 운동을 하고 그냥 흙밭에 누워서 제 나름대로 기도와 성경공부 등으로 마음의 여유를 한껏 즐깁니다.”</P>
<P>&nbsp;</P>
<P><STRONG>전시균 씨의 조금 특별한 식단 </STRONG><BR>항암화학요법을 할 때 시도한 것이 과일요법이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 암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어떻게 해서든 먹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병원 밥은 죽어도 못 먹으니까 입원하러 들어갈 때 (한 달에 한 번 4박 5일 일정 항암치료기간) 사과, 바나나, 복숭아를 듬뿍 사가지고 들어갔다. 그래도 과일은 먹을 수 있어서 끼니 때마다 마구 먹어댔다. </P>
<P>&nbsp;</P>
<P>무엇이든 먹어야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퇴원 후 2~3일 지나면 입맛을 찾기 위해 시큼한 걸 먹었다. 묵은 김치가 대표적이다.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은 어떤 경우이든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설탕이나 화학소금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투병 중일 때 전시균 씨가 활용한 식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nbsp; </P>
<P><BR><STRONG><FONT color=#ff6600>암을 이기는 데 도움을 준 식단 </FONT></STRONG></P>
<P>▶&nbsp;주식-검정쌀에 약간의 보리, 콩이 들어간 밥. <BR>▶&nbsp;국-시래기국, 미역국, 바지락국, 콩나물김칫국 등.<BR>&nbsp;*이때 국물은 쌀뜨물이나 멸치를 우려내서 해야 함. 조미료는 절대 넣으면 안 됨. <BR>▶&nbsp;반찬-오이절임, 깻잎무침, 가지무침 등. <BR>▶&nbsp;기타-쌈 채소 : 상추, 깻잎, 부추, 청국장, 된장.<BR>&nbsp;생식 : 오이, 고추, 양파, 당근. <BR>▶&nbsp;보조-다슬기를 통째로 갈아 5시간 동안 우려낸 물을 마심. <BR>&nbsp;마늘+청국장을 갈아서 스푼으로 떠먹음.&nbsp; <BR>&nbsp;*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일부 해물을 이용해 콩나물과 섞어 찜으로 요리해 먹음.<BR>&nbsp;*항암요법 중에는 예외적으로 육류를 약간 섭취함. </P>]]></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667</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dc:date>2009-11-02 11:50:07</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간경화·간암 말기 이겨낸 강성배 씨 희망가 “무공해 채소·과일 식이요법으로 새 인생 살아요”</title>
			<description><![CDATA[<div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투병기1" src="../../_sys/_upload/image/200910/01/125439362855.jpg" width="540"><br></div><br>“암 투병을 한 후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어요. 고집불통에 내성적이던 제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됐습니다.”<br>강성배 씨(51)는 간암과 간경화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강 씨를 모르는 이웃이 없을 만큼 ‘마당발’이 됐다. 울타리나 배관을 손볼 곳이 생기면 ‘무보수 봉사’도 서슴지 않는다. 강 씨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살아 있는 게 곧 행복”이라며 웃었다.<br><span style="color: rgb(0, 153, 255);">글·사진/ 박길자 기자 </span><br><br>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거실에는 3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고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50kg의 비쩍 마른 몸매에 꺼뭇꺼뭇한 얼굴. “변변한 가족사진 한 장 없었거든요. ‘사형선고’를 받고 마지막으로 사진관에 갔었죠.” <br>대들보 같은 든든한 3형제와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 그에겐 ‘보물’이다. 162cm의 단구에 몸무게 80kg. 헬스클럽에 아침, 점심, 저녁 내리 갈 만큼 건강해진 지금의 모습에서 말기암 환자였던 과거를 떠올리긴 쉽지 않았다.<br><br style="font-weight: bold;"><span style="font-weight: bold;">환자복 입고 매일 등산·걷기 운동… </span><span style="font-weight: bold;">아내 사랑 확인한 ‘행복한 투병’</span><br>강 씨는 2001년 7월 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소화가 전혀 안 돼 동네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암 말기 판정을 받고 아내(최선옥·43세)가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했더니 거절하더군요. 병원에서 해줄 게 없다면서요. 맛있는 음식 먹고 형제나 친구들 만나며 마음 편히 있으라고 하더군요.”<br><br>&nbsp;하루 이틀 지나자 황달에 흑달 증세까지 나타났다. 며칠 새 완전히 숯검정처럼 변했다. 암 크기가 4cm 정도인데 간 전체에 포도송이처럼 암이 흩뿌려져 색전술도, 항암제도, 이식도 해볼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항암치료도, 수술도 받을 수 없다니….’ 세상이 깜깜했다. 스트레스로 일주일 만에 20kg이나 빠졌다. <br><br><img alt="투병기2" style="clear: both; margin-right: 15px;" src="../../_sys/_upload/image/200910/01/125439362862.jpg" align="left" width="290">그는 원래 간염 보균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모태 감염이다. 서른이 다 돼 술을 배운 그는 애주가가 아니라 ‘폭주가’였다. 만취 상태에서 차를 몰았고 집을 못 찾을 정도였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에도 소주 몇 병은 예사로 비웠다. <br>이상 신호는 있었다. 1996년부터 일 년에 한 차례씩 피를 토했지만 터진 혈관을 꿰매고, 며칠 쉰 뒤 술을 마셨다. 병원에서 처방 받은 간경화 치료제로 위안을 삼는 것이 고작이었다. 병원 응급실에 세 번 실려 가면서도 “물처럼 술을 마셨다.”고 한다.&nbsp; <br><br>강 씨는 20대까진 건강체질이었다. 고향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리면 일등을 도맡던 ‘준족’이었다. 그러나 B형 간염이 그의 날개를 꺾었다. 대기업 최종면접은 통과했으나 신체검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해외 취업도 막혔다. 간이 나쁜 것은 집안 내력이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어머니가 간경화로 세상을 떴다. 7남매 중 4명이 간이 좋지 않다. <br><br>부친이 치매를 앓고 있어 집에선 투병이 어려웠다. 장례식장이 있는 곳에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의사는 아내에게 “오늘밤을 못 넘길지 모르니 자리를 비우지 말라.”고 주문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오히려 마음은 가벼웠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nbsp;&nbsp; <br><br>&nbsp;그렇게 병원에서 하루하루 생사를 넘나들던 그에게 우연히 들려온 말 한 마디. “식이요법으로 암을 고쳤다.”는 말이 들려왔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br>‘무엇이든 한 번 해보자.’ 이때부터 그는 항암 성분이 들어 있다는 무공해 채소와 과일로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민들레, 케일 등에서 추출한 천연물로 통합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몸의 면역력을 강화하고, 암세포를 찾아내 원인을 치료하는 ‘표적 치료’를 해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br><br>&nbsp;하루 3잔씩 생즙도 마셨다. 아침 공복 때, 점심, 저녁식사 전 꾸준히 마셨다. 아내가 정성껏 신선초와 케일, 민들레, 돌미나리, 돗나물, 토마토를 넣고 생즙을 만들어줬다. 제철 채소와 제철과일도 많이 먹었다. 상추와 호박, 가지, 오이, 고추, 들깻잎, 양파, 가지 등이 식탁에서 빠지지 않았다. 주식으로 과일을 먹을 땐 하루에 포도 한 박스씩 먹을 정도였다.<br><br>“케일은 유기농식품으로 사고, 나머진 텃밭에서 길렀어요. 생즙이 먹기 싫은 날엔 매실이나 벌꿀, 알로에 중 하나를 섞었어요.” 화학조미료와 인공색소음료, 여러 번 쓴 기름에 튀긴 음식은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투병할 땐 강낭콩, 율무, 현미, 팥으로 만든 현미잡곡밥과 된장찌개를 먹었다. 암에는 백미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버섯과 호박, 조개를 넣은 된장국과 청국장이 식탁에 올랐다. <br>&nbsp; <br><span style="font-weight: bold;">민들레, 케일에서 추출한 천연물로 </span><span style="font-weight: bold;">‘통합치료’</span><br>처음 몇 달은 전쟁이었다. 생즙은커녕 포도 한 알만 먹어도 화장실로 달려갔다. 설사 때문이었다. 문고리를 잡고 겨우겨우 화장실만 석 달간 다녔다. 투병 때 한 번 통증이 오면 꼼짝도 못하고 엎드려서 이를 악물었다. 두 시간 동안 통증을 견뎌야 했다. 정신이 다 몽롱해질 정도였다고 한다.&nbsp; <br><br>아내는 스트레스로 임파선이 뭉쳐 가슴에 자꾸 혹이 생겼다. 빠진 몸무게가 회복되는 데 1년이 걸렸다. 간암은 소화를 못시켜 설사와 함께 변비가 심해진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 뒤편 어등산을 올랐다. 걷기 운동도 열심히 했다. 처음엔 숨이 가빠 10분도 걷지 못했다. 나중엔 걷기와 등산을 4시간까지 할 만큼 좋아졌다. 강 씨는 “간암 환자는 운동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br><br><img alt="투병기3" style="clear: both; margin-left: 15px;" src="../../_sys/_upload/image/200910/01/125439362869.jpg" align="right" width="290">지난해 10월 간암 2기 판정을 받은 큰형도 8개월간 식이요법을 열심히 한 덕에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br>암환자는 예민해지고, 성격이 날카로워진다. 비관적이고, 짜증이 많아진다. 시아버지를 7년 간 보살펴 효부상을 탄 아내의 고생이 컸다. 2002년 7월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았더니 암세포가 사라졌다. 진단을 받은 지 11개월 만이었다. <br><br>강 씨는 “암 성장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환자들의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말했다. “투병 중인 환자는 부인에게도 본심을 털어놓지 않아요. 자신이 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거죠.” 옆에 있던 아내 최선옥 씨가 “육체적인 고생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환자 기분을 맞춰주는 일이 보통 아니거든요.”라며 거들었다. <br>이런 환자들도 강 씨 앞에 서면 마음의 문을 연다. 동병상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통합치료법을 권유했다가 간혹 오해도 산다. “형제들이 오해하는 경우도 있어요. 약장사 아닌가 하고….” <br><br>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암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환자는 희망이 조금만 보여도 틀어잡아요. 반면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아지면 비관하죠. 하루 24시간 왔다 갔다 하는 거죠.”<br>강 씨는 주변 사람들의 한마디에 휩쓸리는 일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암환자에게 붉은 생선이나 육고기는 금기식품입니다. 그런데 누가 ‘옻닭으로 나았다.’면 혹하는 거죠.” 통증이 못 견디게 힘들어지면 병원에 입원한다. 천연물 식이요법은 3∼6개월을 해야 효과를 보는데 중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강 씨는 “암환자에겐 강한 의지와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br><br>아파트 리모델링 일을 하는 강 씨는 본업보다 광주BRM연구소 밀알회장으로 통합치료를 알리는 데 더 열심이다. 강 씨는 투병 때 찍은 가족사진을 일부러 떼지 않았다. “말기암을 이겨냈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집에 옵니다. 그분들에게 사진을 보여드리고 ‘힘내시라.’고 말합니다. 암을 극복하면서 전 다시 태어났어요. 그분들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죠.” <br>]]></description>
			<link>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mid=3&amp;r=view&amp;uid=656</link>
			<dc:creator>건강다이제스트</dc:creator>
			<category><![CDATA[생생투병기]]></category>
															<category><![CDATA[admin]]></category>
									<dc:date>2009-10-01 17:05:48</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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